나병현 기자 naforce@businesspost.co.kr2023-06-25 14: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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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엇매니지먼트가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를 통해 우리 정부로부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따른 손해를 배상받게 된 반면 국내 소액주주들은 배상을 받기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비즈니스포스트]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과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두고 정부와 국제중재 소송에서 이겨 약 1300억 원의 배상금을 받게 되면서 외국 투자자와 국내 투자자 사이에 역차별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외국 투자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를 통해 배상을 받게 됐으나 국내 투자자는 한국 법 체계상 문제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엘리엇매니지먼트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 사건에서 엘리엇의 손을 들어주면서 당시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것과 주주들의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음을 인정했다.
법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국제상설중재재판소는 국내 형사 확정판결을 인용해 국민연금이 사실상 본건 합병에 관하여 캐스팅 보트를 가지고 있어 국민연금의 표결과 삼성물산 주주들의 손실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국민연금의 행위가 우리 정부에 귀속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고 설명했다.
이번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결정은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과 관련해 이뤄졌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은 이재용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을 자연스럽게 승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퍼즐이었다.
당시 제일모직 지분을 23.2% 보유하고 있었던 이재용 회장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통해 삼성물산 최대주주가 되면서 '이재용→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현재 지배구조를 갖출 수 있었다.
합병비율은 삼성물산 1주당 제일모직 0.35주였는데 삼성물산 지분 7.23%를 보유하던 엘리엇은 이와 같은 합병비율이 공정하지 못하다며 반대했다. 제일모직 주식의 가치가 삼성물산에 비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됐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일모직에 지나치게 유리한 합병비율이라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삼성물산 최대주주(지분율 11.6%)인 국민연금이 찬성하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성사됐다.
이에 엘리엇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국민연금에 불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됐고 이로 인해 손해를 봤다”며 ‘한-미 FTA’ 위반을 주장했는데 이를 국제상설중재재판소가 인정한 것이다.
한-미 FTA는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와 충분한 보호 및 안전을 포함한 국제관습법상 외국인에게 인정되는 대우를 최소기준대우 의무로 규정하고 있으며 중재재판소는 우리 정부가 FTA 협정상 최소기준대우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합병 전 삼성물산의 지분을 2.18% 보유했던 미국 헤지펀드 메이슨캐피탈도 현재 같은 문제로 우리 정부와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메인슨캐피탈의 소송건은 ‘엘리엇 사건’과 사실상 동일한 구조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정부는 또 다시 패소할 공산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 폴 싱어 엘리엇매니지먼트 회장. <엘리엇매니지먼트>
해외투자자들과 달리 현재 국내투자자들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건에 대해 전혀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올해 초 삼성물산 주주 강모씨 등 72명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9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패소했다.
재판부는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삼성물산-제일제당 합병을 부당하게 지시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최종 결정권은 국민연금 투자위원회에 있었다고 판결했다.
즉 국제중재재판소와 달리 '정부 압력→국민연금 투표'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
옛 삼성물산 주주였던 일성신약도 국민연금공단이 위법하게 합병에 개입해 손해를 봤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했지만 지난해 10월 1심, 올해 6월16일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이 때문에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로 보상을 받게 된 외국인투자자와 비교해 국내투자자들이 역차별을 받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커지고 있다.
FTA에 근거하면 손해배상이 가능한 반면 한국법으로는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는 법체계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상법 개정을 통해 소액주주 보호의무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상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엘리엇은 미국인이라 FTA로 보상을 받았지만 내국인은 상법상 주주보호의무가 인정되지 않다보니 그 어디에서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며 “주주의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되면 외국인 주주의 이익을 침해한 행위는 내국인 주주들에게도 위법한 행위로서 손해배상 사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행 상법 제382조의3은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고 이사의 충실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의 주주권리에 대한 보호 의무는 포함돼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우리 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에서도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전제하지 않은채 판결을 내렸고 결국 소액주주들은 손해를 전혀 배상받지 못한 것이다.
국내법은 소액주주보호 의무규정 대신 주식매수청구권과 같은 제도로 소액주주를 보호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소액주주 침해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성원 트러스톤자산운용 부사장은 올해 3월 국회에서 열린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 간담회-일반주주 피해 증언대회’에서 “이사가 소수주주 이익보다는 인사권을 쥔 대주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과 현행 규제의 한계점을 감안할 때 소수주주 권리 보장을 위해서는 이사가 주주의 비례 이익 혹은 총주주에 충실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으로 상법개정안 통과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