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백화점이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사진)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사주의 마법'을 부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
[비즈니스포스트] 현대백화점이 지주회사 전환을 두고 ‘자사주의 마법’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자사주의 마법이란 인적분할을 통한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자사주를 매개로 지배주주의 지배력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강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의 현대백화점 지배력이 낮은 현재 상황에서 자사주의 마법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하지만 현대백화점이 주주가치를 높이겠다며 1천억 원 넘는 돈을 들여 매입한 자사주를 정 회장의 지배력 확대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소액주주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20일 현대백화점의 최근 10년 공시를 살펴보면 2015년부터 꾸준히 자사주를 매입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백화점은 2015년 총 322억 원을 들여 자사주 24만4천 주를 매입한 뒤 2년 만인 2017년에 다시 241억 원을 투자해 자사주 23만4천 주를 샀다.
2019년부터는 해마다 자사주 매입 행보를 보였다.
현대백화점은 2019~2021년 3년 동안 해매다 자사주 23만4천 주씩을 샀다. 이 기간에 자사주 매입에 투입된 돈은 모두 527억 원이다. 2015년부터 보면 6년 동안 자사주 매입에 쏟아부은 돈은 모두 1090억 원에 이른다.
자사주 보유 비중은 자연스럽게 늘었다. 현대백화점이 보유한 자사주 비중은 2015년만 해도 1.5%였지만 올해 2분기 말 기준으로 6.6%까지 높아졌다.
현대백화점은 그동안 자사주를 사들이는 배경을 놓고 “주가 안정을 통한 주주가치 제고”라고 원론적으로만 설명해왔다.
하지만 현대백화점이 최근 지주회사 전환을 결정하면서 결국 오너일가의 지배력 확대를 위해 꾸준히 자사주를 매입해온 것 아니냐는 의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이 8월 내놓은 발간물 ‘자사주 마법과 자사주의 본질’을 보면 2000년부터 2021년까지 인적분할을 완료한 기업 가운데 지주회사 전환과 관련된 기업들은 인적분할 기준일에 이르기까지 자사주 지분율이 꾸준히 상승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들의 자사주 비중은 인적분할 36개월 전 7.4%에서 인적분할 3개월 전 9.1%까지 늘었다.
김준석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특히 자사주 지분율의 증가는 주로 자사주 지분율이 낮았던 기업에서 나타난다”며 “이는 자사주가 인적분할을 이용한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핵심적 요소로 활용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바라봤다.
이런 분석을 고려하면 현대백화점이 2015년 1.5%에 불과했던 자사주 지분율을 6년 동안 5%포인트 이상 확대한 것도 지배구조 개편을 염두에 두고 벌인 행보로 볼 여지가 있다.
현대백화점이 추진하려는 지주회사 전환 로드맵을 단순화하면 이렇다.
현재 현대백화점그룹의 지배구조는 ‘
정지선 회장→현대백화점→지누스, 현대백화점면세점, 현대쇼핑, 한무쇼핑’ 등이다.
정지선 회장은 2분기 말 기준으로 현대백화점 지분 17.09%를 들고 있어 지배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인적분할을 통해 존속회사 현대백화점과 신설회사 현대백화점홀딩스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현대백화점홀딩스는 기존 자사주 6.6%만큼 현대백화점 지분을 가지게 된다.
‘
정지선 회장→현대백화점홀딩스(17.09%)→현대백화점(6.6%)’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자사주의 마법은 다음 단계에서 극대화된다.
정지선 회장은 현대백화점홀딩스를 최정점으로 하는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인적분할 이후 갖게 되는 현대백화점 지분 전량(17.09%)을 현대백화점홀딩스로 현물출자한 뒤 현대백화점홀딩스가 발행할 신주를 확보하게 된다.
현대백화점홀딩스와 현대백화점 주식의 교환 비율을 1대 1이라고 가정한다면 정 회장은 현대백화점홀딩스 지분 34.18%를 보유하게 된다.
현대백화점홀딩스는 정 회장에게서 출자받은 현대백화점 지분 17.09%에다가 자사주 6.6%를 합해 현대백화점 지분을 23.69%까지 늘릴 수 있다.
‘
정지선 회장→현대백화점홀딩스(34.18%)→현대백화점(23.69%)→지누스, 현대백화점면세점’의 구도는 이렇게 완성된다.
정 회장의 현대백화점홀딩스 지배력이 단숨에 30%대로 높아지는 것은 물론 자사주 덕분에 지주회사의 사업회사 장악력도 커지게 되는 셈이다.
사실 이런 방법은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기업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재벌들이 많이 사용해온 방법이다. 범현대가인 현대중공업그룹도 이 과정을 통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바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자사주의 마법은 항상 논란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법인이 영업활동을 통해 애써 벌어들인 현금을 활용해 자사주를 사들인 것은 궁극적으로 주주가치를 높여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오너일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목적으로만 자사주가 활용된다면 나머지 소액주주들의 이익은 침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김준석 연구위원은 “지배주주의 지배력 강화 비용은 결국 지배주주가 아니라 외부주주가 지불하는 셈이다”며 “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구조조정(기업 지배구조 개편)의 시너지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실은 주주 사이에서 균등하게 배부되지 않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
이상훈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2020년 논문에서 자사주의 마법을 작심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지배주주의 지배력이 획기적으로 급증해 향후 어떠한 주주의 도전도 사실상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성을 완성했음에도 그리고 그 원천은 일반주주들의 주식 가치에 n분의 1씩 나뉘어 있던 지배권 가치를 집적시킨 것에서 유래한 것임에도 지배주주는 개인 돈을 한 푼도 출연한 바 없으며 일반주주는 한 푼도 보상받은 바 없다는 점이 문제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지배권 주식을 가지려면 시장에서 돈을 주고 주식을 사 모으는 것이 원칙이라는 기존 통념을 뒤엎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며 “한국은 이것을 경영권 승계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승계는 본래 자신이 받을 몫을 이어받는 개념이기에 승계보다는 남의 것을 빼앗는다의 의미의 ‘편취’라는 단어가 실상(자사주의 마법)에 보다 가깝다”고 지적했다.
현대백화점은 현재 자사주 처리 방안과 관련해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16일 참고자료에서 “지주회사 전환 과정은 모든 주주의 이익이 일체 침해되지 않고 증대될 수 있도록 진행할 것이다”며 “특히 현물출자 방식의 유상증자를 하는 경우 모든 주주를 대상으로 공정한 기회를 제공해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선택권을 보장하게 될 것이다”고만 밝힌 상태다.
현대백화점이 다만 인적분할 과정을 추진하기 전에 자사주를 소각한다면 이런 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SK텔레콤은 지난해 인적분할 추진하면서 자사주의 90%가량을 소각했다. 일명 자사주의 마법과 같은 꼼수로 대주주의 영향력만 높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당시 SK텔레콤이 소각한 자사주 규모는 2조6천억 원가량이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