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부터 3년간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 부장검사, 1995년 1년 동안 대전지방검찰청 차장검사를 지냈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장, 1996년부터 1997년까지 부산지방검찰청 제1차장검사로 일했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서울지방검찰청 제3차장검사, 1998년부터 다음해까지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장을 지냈다.
1999년 한 해 동안 광주고등검찰청 차장검사로 일했고,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지냈다.
1999년부터 다음해까지 대검찰청 감찰부장으로 근무했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법무연수원장을 맡았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맡았다.
2013년 2월 제42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고 밝혔으나 그대로 유임됐다.
2015년 2월 국무총리에서 물러났다.
◆ 학력
부산 영도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를 졸업했다.
12남매(6남 6녀) 중 열째로 태어난 그는 형편이 어려워 경남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진주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63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성균관대학교 법정대학 법률학과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부인 최옥자 씨(62)와 사이에 아들 정우준(35)을 두고 있다.
◆ 상훈
◆ 상훈
어록
“책임총리라는 것은 정확하게 보필하고, 바르게 보필하는 게 책임총리가 아니겠느냐 생각을 갖고 있다.”(2013/02/08, 경향신문, 총리 지명 뒤 책임 총리제에 대한 답변)
“검사직만 한 것은 아니고 법률구조공단 이사장, 변호사도 하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제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최선을 다 하겠다.”(2013/02/08, 경향신문, 총리 지명 뒤 검사 이력만 있다는 평가에 대해)
“주소 이전은 단지 무주택자로서 내집 마련을 위한 주택청약자격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코 부동산 투기를 위한 위장전입 목적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실제 거주하지 않으면서 주민등록을 옮긴 것에 대해서 송구하게 생각한다.”(2013/02/13, 부산지검 특수부장 시절 위장전입 의혹에 대해 사실이라고 인정하며)
“제 아이가 군 복무를 필하면서 단단해지고 떳떳한 아이가 되기를 원했는데 병으로 군대를 못 가서 참으로 안타깝다.”, “군을 필한 국민들과 군인에게 미안하고 부끄럽기도 하다.”(2013/02/21, 국회 인사청문회, 아들 정우준의 병역면제에 대해)
“월급은 2000만 원 됐는데 세금을 떼면 1300만 원 됐고 상여금이 돼서 좀 많이 받았다.”, “서민에 비해 월급을 많이 받았지만 돈은 정당하게 벌고 잘 쓰면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2013/02/21, 국회 인사청문회, 전관예우로 법무법인 로고스에서 서민의 삶과 동떨어진 급여를 받은 것 아니냐는 이상규 통합진보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이번 사고가 발생하기 전 예방에서부터 사고 이후의 초동대응과 수습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을 제때에 처리하지 못한 점에 대해 정부를 대표하여 국민 여러분께 사과 드린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비통함에 몸부림치는 유가족들의 아픔과 국민 여러분의 슬픔과 분노를 보면서 국무총리로서 응당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내각을 총괄하는 총리인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고 사죄드리는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제 더 이상 자리를 지킴으로서 국정운영에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사퇴를 결심했다.”(2014/04/27, 세월호 침몰 사건 후 정부중앙청사에서 긴급회견을 열고 총리직을 사퇴하며)
“세월호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자 했으나, 후임 총리 임명 실패에 따른 장기간 국정공백 우려로 다시 총리직을 수행하게 된 데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민망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그간 사고현장에서 느낀 그대로 국가혁신에 매진함으로써 책임의 일단을 다 하고자 한다.”(2014/07/16, 유임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공식입장을 밝히면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발족한 두 기관은 공공부문 국가혁신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재난안전 컨트롤타워 역할과 공직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앞장서서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안고 있다.”(2014/11/19, 국민안전처와 인사혁신처의 공동출범식에서)
◆ 평가
1974년 서울지검 영등포지청 검사를 시작으로 30년간 검찰에 몸담았다. 검찰 내에서 ‘깐깐한 원칙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검사 시절에 '대도' 조세형 사건과 수서지구 택지공급 비리사건을 수사했다. 또 명성사건, 장영자 사기사건,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안기부 배후조종 '북풍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검찰 내 특수통으로 평가받았다.
1999년부터 이듬해까지 대검 감찰부장을 지낼 때 ‘검찰 낮술 금지’를 선포하면서 검찰개혁에 나섰다. 술은 세지만 즐기지 않고 골프도 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을 떠난 뒤 '삼성 비자금' 사건 특별검사로 추천받을 만큼 수사능력을 인정받았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재직하면서 매니페스토 선거운동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4년간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맡았을 때는 공단이 `친서민 법률복지기관'으로 자리 잡는 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2년 새누리당 공직자후보추천위원장을 맡으며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지난 4월 사의를 표명한 뒤 안대희, 문창극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헌정사상 최초 유임 총리가 됐다.
하지만 그는 유임 이후 ‘책임총리’로서 별다른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