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 대기업이 비상계엄 사태에 환율 불안과 대외신인도 하락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삼성과 SK, 현대자동차, LG그룹 등 재계 주요 기업들이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총격 사망 후 45년 만에 선포된 비상계엄 사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을 둘러싼 전 세계 경영환경이 급속히 악화되는 가운데 환율 불안, 대외 신인도 하락 등으로 더 큰 위기에 처할 가능성에 재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등 국가 주력 산업에서 이뤄지고 있던 민관 협동도 모두 일시 정지돼 국제 정세 변화에 따른 대응이 늦어지고, 국내 기업들의 투자동력이 상실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4일 재계 취재를 종합하면 하룻 밤 사이 계엄령 발표와 해제가 동시 이뤄지는 등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한국의 대외 신인도 저하는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네덜란드 금융그룹 ING는 4일 보고서를 통해 “한국 계엄령 사태로 경제와 정치 환경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며 “(한국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질 가능성은) 현재 단계에서는 불확실하지만,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라고 진단했다.
한국은 현재 AA급 국가 신용도를 보유하고 있다.
국가 신용도가 떨어지지 않더라도, 외국인 투자자들이 정치 불확실성을 이유로 한국 채권을 대량 매도한다면 해외 자금 이탈로 원/달러 환율은 급격하게 상승할 수 있다. 이는 정유와 항공, 철강, 가전 등 해외에서 원자재나 원료를 수입하는 기업들의 비용 부담이 커지는 요인이다.
전날 저녁부터 발령된 비상계엄으로 한때 원/달러 환율이 1435원까지 치솟았고, 이날 장중 1410원대에서 거래되고 있다.
대외 신인도 하락으로 외국에서 투자를 받는 것도 까다로워지고, 기업의 해외 사채 발행 등을 통한 자금 조달도 차질을 빚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된 아이셰어스 MSCI 코리아 ETF와 야간 선물은 각각 -7%, -5%대까지 하락했고, 런던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삼성전자 주식예탁증서(DR) 우선주는 7.5%까지 급락했다.
해외투자자들이 비상계엄 사태에 놀라, 한국 기업에 투자하는 비중을 줄인 것이다.
▲ 국내 주요 기업들이 비상계엄 사태로 발생할 수 있는 환율 불안, 대외신인도 하락 등과 관련한 대응책 마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연합뉴스> |
이 같은 매도 추세는 장기간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한국 증시는 계엄령 발표와 해제 등 정치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부담”이라며 “오늘 채권시장에서의 외국인 수급이 주식시장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기업들은 최근 심각한 경영 위기에 휩싸여 있다.
삼성전자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라고 불릴 만큼 반도체 산업에서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11월27일 조직 쇄신을 위해 메모리반도체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 사장 2명을 전격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중국 수출 금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 등 대응해야 할 외부 변수도 계속해서 늘고 있다.
중국산 배터리와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는 SK그룹, LG그룹이나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폐지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현대차그룹도 해외 기업과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정부와 긴밀히 협력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탄핵 정국으로 가게 되면서 정부의 외교적 대응 능력이 사실상 마비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비상계엄령 사태 여파로 이미 주요 부처 장·차관급 일정이 대거 취소되는 상황”이라며 “정국 혼란한 상황에서 산업통상자원부나 외교부가 해외 정세 변화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치 불확실성’을 이유로 투자 결정을 미루거나 취소하는 기업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 시민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 병력들이 모여 혼잡스러운 상황을 빚고 있다. <연합뉴스> |
최근 한국경제인협회가 여론조사업체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2025년 500대 기업 투자계획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기업 10곳 가운데 7곳은 투자 계획이 없거나 아직 수립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 국내외 경제전망이 부정적(33.3%)이라는 이유를 1순위로 꼽았는데, 이번 비상계엄 사태로 투자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롯데그룹이나 CJ그룹 등 내수 위주의 기업들도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국내 정치 불안은 궁극적으로 내수 부진으로 이어져 국내 경기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롯데는 최근 유동성 위기설이 나오고 있는 만큼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수 시간 만에 계엄령이 해제됐지만, 국내 정치 불확실성 리스크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여 원화 가치 추가 하락과 경기 하방 리스크 확대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며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한 유동성 위기설 등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 신뢰도 하락은 자금조달 리스크를 키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