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사업의 주요 무대가 해외시장인 만큼 글로벌 감각이 뛰어난 이석희 사장에게 SK온 사령탑을 맡겼다는 해석도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은 7일 발표한 ‘2024 조직개편 및 임원인사’를 통해 이석희 사장을 SK온 대표이사로 신규 선임했다고 밝혔다.
이 사장으로서는 SK하이닉스 대표에서 물러난 지 약 2년 만에 SK그룹의 차세대 먹거리로 꼽히는 배터리사업 수장을 맡게 된 것이다.
SK온의 사령탑 변화는 그룹 차원의 인사 쇄신 기조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글로벌 경영 환경 악화와 그룹의 핵심사업 실적 부진으로 세대교체 필요성에 대한 그룹 내 공감대가 커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총수 일가를 제외한 그룹 내 최고위급 부회장단 다수가 이번 인사를 통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또 SK그룹 주요 계열사들에서 대표이사를 비롯한 인사 교체 폭도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SK온 내부적으로도 조직에 변화의 바람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SK온은 국내 배터리 셀 제조사 3곳 가운데 유일하게 영업 흑자를 못 내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적어도 분기 기준으로는 흑자 전환이 가능할 것으로 점쳐지기도 했지만 3분기까지도 적자 행진이 지속됐다.
비록 매출이 늘어나고 적자 폭은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긴 하지만 배터리산업의 전방 업종인 전기차시장의 성장 속도가 둔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내년에도 업황을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석희 사장으로서는 엄중한 시기에 SK온의 지휘봉을 잡아 그룹의 차세대 먹거리로 떠오른 배터리사업의 이익기반을 확고히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이 사장이 엔지니어 출신인 만큼 SK온의 대표 교체에는 기술력에 초점을 맞춰야 할 필요성이 반영됐다는 시각도 나온다.
이 사장의 전임자인 지동섭 대표이사 사장이 전략 분야 전문가인 반면 이 사장은 연구원과 전자공학과 교수 등을 지낸 기술 전문가다. 물론 반도체 분야에서 주로 활동해온 만큼 그의 경력에서 배터리 분야와 접점이 많지는 않았지만 재무나 전략, 기획 쪽에 강점을 지닌 경영인들과 비교하면 기술적 이해도는 훨씬 높다고 볼 수 있다.
공정 개선, 미세 공정 등을 담당했던 이력도 있는 만큼 배터리 공정에서 수율을 개선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데도 이 사장의 경험이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터리업계에서는 차세대 배터리·소재 개발을 위한 기술력 확보가 미래시장 선점의 핵심 요소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연구개발(R&D)에 역량과 자원이 집중돼야 한다는 점도 기술 전문가를 중용하게 된 배경으로 해석된다.
이 사장이 글로벌 감각이 뛰어나다는 점도 이번 인사에서 중요한 참작 사항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이 사장은 미국과 인연이 깊다. 과거 미국 인텔에서 오랫동안 일한 데다 SK하이닉스 대표로 있을 때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를 추진하기도 했다.
글로벌 배터리산업에서 북미시장은 성장세가 가장 가파를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이다. 북미는 유럽, 중국과 함께 3대 전기차 시장으로 분류되는데 나머지 두 개 거대 시장과 비교해 전기차 전환율이 낮아 성장 잠재력이 더 큰 것으로 분석된다.
게다가 픽업트럭과 SUV 등 큰 차체의 차량 선호도가 높다. 유럽이나 중국과 비교하면 전기차 한 대에 쓰이는 배터리 용량이 더 커 고객사가 전기차 한 대를 판매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매출이나 이익도 더 클 수 있다.
▲ SK온과 포드의 합작법인 블루오벌SK가 켄터키주 글렌데일에 짓고 있는 1공장. < SK온 >
SK온은 LG에너지솔루션과 더불어 미국에서 생산능력 확대에 가장 공격적으로 나선 셀 제조사 가운데 한 곳으로 꼽힌다. SK온은 현재 미국 조지아 단독공장을 통해 연산 20GWh 넘는 생산능력을 확보하고 있는 데다 앞으로 여러 합작공장을 통해 생산능력을 지속해서 늘린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다.
SK온이 주요 완성차업체들과 합작공장도 꾸리고 있는 만큼 향후 이익 배분이나 비용 분담 문제에서 협상해야 할 사안들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또 내년에 치러지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전기차에 회의적 시각을 지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어 북미시장에는 정치적 불확실성도 드리워져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미국 사업의 경험이 풍부하고 글로벌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 기업의 사령탑을 맡는 게 여러모로 유리할 수 있다.
이석희 사장 개인으로서도 SK온 대표로서 경영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큰 기회라 할 수 있다. 그가 이전에 몸담았던 SK하이닉스와 비교하면 SK온은 비상장사에 규모도 작지만 차세대 성장동력인 배터리 사업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성장 잠재력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재계 안팎에서는 SK온이 기업공개(IPO)를 통해 상장하게 되면 SK하이닉스를 제치고 그룹 내 시가총액 1위 계열사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현재 배터리 경쟁사인 LG에너지솔루션은 삼성전자에 이어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사장은 SK온 경영 성적을 통해 명예 회복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2022년 SK하이닉스 대표에서 물러나게 된 데는 그가 인수를 주도했던 솔리다임이 지속해서 영업손실을 내며 누적 적자가 불어난 문책 성격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 바 있다.
이 사장이 SK온에서 흑자구조를 안착시키고 목표로 삼고 있는 글로벌 톱티어 배터리기업으로서 위상을 확고히 하게 된다면 이 사장 역시 경영자로서 재평가 받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 사장은 1965년 6월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무기재료공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무기재료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에 입사했다가 유학을 떠나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재료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텔에서 11년 동안 근무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자공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뒤 SK하이닉스에 전무로 영입돼 미래기술연구원장과 D램개발사업부문장을 지냈다. 이후 SK하이닉스 사업총괄 최고운영책임자(COO)와 경영지원업무 총괄을 겸임했다.
2018년 SK하이닉스 연말 인사에서 대표이사에 오른 뒤 2022년 3월까지 대표이사로 근무했다.
SK이노베이션은 ‘2024년 조직개편 및 임원인사’ 발표 자료를 통해 “이 사장은 ‘인텔 기술상’을 3차례 수상하는 등 글로벌 제조업 전문가로서 SK온을 첨단 기술 중심의 글로벌 톱티어 배터리기업으로 진화시킬 최적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류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