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연 기자 nuevacarta@businesspost.co.kr2014-07-22 12:03:49
확대축소
공유하기
전체
활동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어록
생애
▲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
최지성은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1951년 2월 2일 태어났다.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1977년 서울대학교 무역학과 학사로 졸업했다.
1977년 삼성물산에 입사한 뒤 37년 동안 삼성그룹에서 근무했다. 2006년 삼성전자 보르도TV가 소니를 제치고 전 세계 시장 판매량 1위를 차지하게 만든 것에 힘입어 2010년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로 임명됐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의 흥행을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2012년 6월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에 선임되면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뒤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최측근 인사로 알려졌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으로서 실질적인 2인자. 다만 전임들에 비해 밖으로 보이는 말은 줄이고 행동은 최대한 보여주는 타입이다. 스스로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그림자 역할만 하겠다고 공언했다. 기자들과 거의 만나지 않으며 질문을 받아도 인삿말이나 '할 말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만든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삼성전자에 있던 시절 내놓은 ‘보르도’ TV 시리즈를 통해 삼성전자는 34년 만에 TV 시장 매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휴대폰 시장에서도 ‘애니콜’의 성공으로 삼성이 노키아를 추적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 탄생을 이끌어내 삼성전자를 세계 1위 기업으로 만드는데 보탬을 줬다.
삼성전자에서 영업부장부터 사업부장과 대표이사까지 역임한 대표적 '삼성전자맨'이다. 경영자가 된 뒤에도 현장 경험을 살려 삼성전자와 계열사 업무 방향 및 목표 조율에 집중했다. 각 사업부장, 현장 책임자 권한을 존중하면서 조력자와 코치 역할에 주력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래전략실장이 된 이후에도 전임자들에 비해 보다 세밀한 업무를 지시했다. 그룹 주요 임원 오전 6시 30분 출근 제도를 실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평소에도 시간을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 통한 업무 지시와 피드백으로 조직 내 업무 대응 속도를 높였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 정확한 일정 관리에 따라 업무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세계 어디서나 사내 인트라넷으로 업무 메일을 받는다. 어떤 사안이든 낮밤 구분 없이 10분 내로 결정 내려 지시사항을 전달한다고 알려졌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싫어해 ‘독일병정’과 ‘최틀러’라는 별명이 있다.
삼성가 오너 일가와 친밀한 사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보좌에 충실하며 그가 해외 출장을 갔을 경우 삼성 내부를 단속하며 해외 현장업무 보고와 지시를 전달했다. 이건희 회장이 해외 VIP와 만나는 자리에도 항상 배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는 비서실 근무 당시 인연을 맺었으며 '가정교사'로 알려졌다.
이재용 부회장과 가장 커뮤니케이션이 잘 통하는 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건희 회장이 와병한 뒤엔 두 사람이 서로 상담해 삼성그룹을 이끌고 있다.
승부사 기질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1인 소장으로 일할 때 반도체 기술 교재 1000페이지를 통째로 암기해 부임 첫해 100만 달러 규모의 반도체를 팔았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당시 스위스로 가기 위해 알프스를 넘던 중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생명이 위험했던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삼성물산 잡화수출부 잡화과에 1977년 입사한 뒤 1979년부터 삼성물산 유럽지부에서 근무했다. 1981년 삼성그룹 비서실 기획팀 담당과장으로 승진해 4년간 근무했다.
1985년 프랑크푸르트 1인 사무소장으로 유럽에서 일했다. 1991년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관리팀장으로 승진해 국내로 돌아왔다. 1992년 반도체판매사업본부 메모리수출담당을 맡았으며 1993년 삼성그룹 비서실 전략1팀장으로 자리를 바꿨다.
1994년 삼성전자 반도체본부 메모리영업담당으로 자리를 바꾼 뒤 2001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2003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부사장으로 보직을 바꿔 4년간 근무했다. 2007년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이 된 뒤 2009년 삼성전자 DMC부문 사장 겸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2012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됐다. 같은해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근무 중이다.
◆ 학력
1967년 춘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를 1년간 다니다 서울고등학교로 전학해 1970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1977년에 졸업했다.
◆ 가족관계
◆ 상훈
1987년 제24회 무역의날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6년에는 전자의날 훈포상 금탑산업훈장을 달게 됐다.
2009년 한국통신학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정보통신대상’을 수상했다. 2009년 매경이코노미가 선정한 ‘올해의 CEO’가 됐다. 2011년 삼성전자가 650억 달러 수출탑을 쌓았다.
2012년에도 매경이코노미는 그를 ‘올해의 CEO’로 선정했다.
◆ 상훈
1987년 제24회 무역의날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6년에는 전자의날 훈포상 금탑산업훈장을 달게 됐다.
2009년 한국통신학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정보통신대상’을 수상했다. 2009년 매경이코노미가 선정한 ‘올해의 CEO’가 됐다. 2011년 삼성전자가 650억 달러 수출탑을 쌓았다.
2012년에도 매경이코노미는 그를 ‘올해의 CEO’로 선정했다.
어록
“미래전략실은 (이건희 회장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계열사에 군림하지 말라.” (2012/07/02,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정례조회에서 미래전략실 임직원들에게)
“그냥 한 번 둘러보러 왔다” (2012/10/24, 삼성 서초사옥 딜라이트숍에 직접 나타나 삼성전자가 만든 기기 및 기술 전시를 둘러본 뒤 ‘무슨 일로 왔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며)
“인사는 나도 모른다.” (2012/12/05, 삼성 사장단 인사 후 승진자들과 오찬을 가지고 나서 출퇴근길에 기자들에게 인사 관련 질문을 받자)
“(삼성그룹은) 사랑받는 기업이 되어야 하며, 그러려면 절대 자만해선 안 된다.” (2013/01/02,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1분기 조례에서 임직원들에게)
◆ 평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으로서 실질적인 2인자. 다만 전임들에 비해 밖으로 보이는 말은 줄이고 행동은 최대한 보여주는 타입이다. 스스로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그림자 역할만 하겠다고 공언했다. 기자들과 거의 만나지 않으며 질문을 받아도 인삿말이나 '할 말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만든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삼성전자에 있던 시절 내놓은 ‘보르도’ TV 시리즈를 통해 삼성전자는 34년 만에 TV 시장 매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휴대폰 시장에서도 ‘애니콜’의 성공으로 삼성이 노키아를 추적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 탄생을 이끌어내 삼성전자를 세계 1위 기업으로 만드는데 보탬을 줬다.
삼성전자에서 영업부장부터 사업부장과 대표이사까지 역임한 대표적 '삼성전자맨'이다. 경영자가 된 뒤에도 현장 경험을 살려 삼성전자와 계열사 업무 방향 및 목표 조율에 집중했다. 각 사업부장, 현장 책임자 권한을 존중하면서 조력자와 코치 역할에 주력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래전략실장이 된 이후에도 전임자들에 비해 보다 세밀한 업무를 지시했다. 그룹 주요 임원 오전 6시 30분 출근 제도를 실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평소에도 시간을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 통한 업무 지시와 피드백으로 조직 내 업무 대응 속도를 높였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 정확한 일정 관리에 따라 업무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세계 어디서나 사내 인트라넷으로 업무 메일을 받는다. 어떤 사안이든 낮밤 구분 없이 10분 내로 결정 내려 지시사항을 전달한다고 알려졌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싫어해 ‘독일병정’과 ‘최틀러’라는 별명이 있다.
삼성가 오너 일가와 친밀한 사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보좌에 충실하며 그가 해외 출장을 갔을 경우 삼성 내부를 단속하며 해외 현장업무 보고와 지시를 전달했다. 이건희 회장이 해외 VIP와 만나는 자리에도 항상 배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는 비서실 근무 당시 인연을 맺었으며 '가정교사'로 알려졌다.
이재용 부회장과 가장 커뮤니케이션이 잘 통하는 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건희 회장이 와병한 뒤엔 두 사람이 서로 상담해 삼성그룹을 이끌고 있다.
승부사 기질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1인 소장으로 일할 때 반도체 기술 교재 1000페이지를 통째로 암기해 부임 첫해 100만 달러 규모의 반도체를 팔았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당시 스위스로 가기 위해 알프스를 넘던 중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생명이 위험했던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 기타
삼성전자를 전 세계 TV 시장 1위로 올린 '보르도' 시리즈는 그가 좋아하는 보르도 와인에 착안해 이름을 붙였다. 매출 1위를 거둔 뒤 이를 기념해 보르도 와인을 원샷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서울고와 서울대 출신이나 동문회에 나가지 않는다. 다만 서울고 각 교실에 TV를 기증하는 등 애교심을 보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서울대 재학 당시엔 박정희 독재정권 반대 투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동문으로 김문수 1971년 서울대 무역학과 입학 후 박정희 독재정권 반대 투쟁 경험. 함께 서울대 상대 운동권에서 활동한 인물은 김문수 의원과 김상곤 전 경기도 교육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