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내가 3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 정열을 불태운 곳이다. 척박한 정치와 경제 풍토 속에서 나는 삼성이라는 기업에 내가 가진 능력과 지식 그리고 젊은 오기와 욕심을 모두 쏟아 부었다.” (1993년 출간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나는 한때 삼성을 운영했던 사람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삼성에서 물러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부사장급의 직함만 17개를 가지고 있었다.” (1993년 출간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나도 모반에 개입이 된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묵인은 했으리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 (1993년 출간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그때라도 자존심을 죽이고 매달렸으면 어떤 형태로든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차마 그러고 싶지 않았다.” (1993년 출간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최근 건희가 어린애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앞으로 삼성을 누가 끌고 나갈건지 걱정이 된다. 건희는 현재까지 형제지간에 불화만 가중시켜왔고 늘 자기 욕심만 챙겨왔다. 한 푼도 안주겠다는 그런 탐욕이 이 소송을 초래했다.” (2012/04/24,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며)
◆ 평가
태어날 때는 황태자였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에 한낱 외로운 노인에 불과해 ‘비운의 황태자’라고 불린다. 경영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는 평을 듣는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본래 삼성그룹을 이끌어갈 인물로 꼽혔다.
삼성의 모태기업인 제일제당 대표이사, 삼성물산과 삼성전자의 부사장, 삼성문화재단 이사 등 그룹의 주요 직위에 올라 후계구도를 굳히는 듯 했다.
1966년 삼성그룹 계열사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이병철 회장 대신 삼성그룹을 맡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이 삼성 참모진에게 “맹희 부사장에게 세 번 요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내게 가져오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당시 이맹희의 위치를 보여 준다.
그룹을 맡은 지 6개월만에 이병철 회장에게 “그룹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동생 이창희가 이병철 회장을 몰아내려고 청와대에 투서를 보낸 사건으로 후계자 구도가 변했다. 이병철 회장은 투서의 주범이 이맹희라고 믿었고 이후 이병철 회장과 부자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1973년 이병철 회장이 이맹희를 불러 종이에 현재 맡고 있는 직함을 모두 적어보라고 했다. 이병철 회장은 “니가 할 수 있는 것만 해라”라고 하며 14개 회사의 직함을 지웠고 이 때 후계구도에서 공식적으로 밀려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맹희는 이 같은 아버지의 결정을 물러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일본으로 떠나면서 삼성그룹과 거리를 둔 삶을 살았다. 겨울은 사냥을 하고 여름은 워커힐에서 말을 타는 등 방랑의 시간을 보냈다.
1993년 제일비료를 다시 세워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했다. 장남 이재현이 CJ제일제당을 맡으며 삼성에서 계열분리해 나왔으나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2012년부터 동생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상대로 상속 소송을 제기했다. 여동생 이숙희가 힘을 보탰지만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하고 상고는 포기했다.
소송을 진행하다가 폐암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암이 다른 부분으로 전이돼 투병생활을 이어오다가 2015년 8월14일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에서 김창성 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온 마음 약한 아버지였다”고 평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이채욱 CJ그룹 대표는 “각종 궂은 일을 자처하며 열정적으로 일을 사랑했지만 순간 그 모든 공적과 영화를 내려놓고 가족과 회사를 위해 희생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