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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

삼성그룹 비운의 황태자
오승훈 기자 hoon@businesspost.co.kr 2015-12-03 13: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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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
▲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



이맹희는 1931년 6월20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이병철 삼성그룹 초대 회장과 어머니 박두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도쿄 농업대학과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농업학을 공부했고 미시간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유학생활을 마칠 때쯤 손복남과 결혼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한일은행에 입행했다. 2년 뒤 안국화재로 직장을 옮겼다. 삼성물산, 중앙일보, 삼성전자 등 삼성그룹 계열사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자 잠시 삼성그룹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이 복귀하자 삼성전자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생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이 일으킨 경영권 분쟁에 휘말려 이병철 회장의 눈밖에 났다. 이 과정에서 17개 계열사 임원에서 대부분 물러났고 후계자 구도에서도 밀려났다.

그 뒤 대구와 부산 등 국내 산간벽지를 떠돌며 생활하다 제일비료를 설립해 재기를 꿈꿨으나 실패했다.

이맹희는 이병철 회장의 상속재산을 둘러싸고 동생인 이건희 회장과 법정다툼을 벌였다. 이 법정다툼은 이건희 회장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맹희는 폐암 2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재발해 투병생활을 이어오다 중국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태어날 때는 황태자였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에 한낱 외로운 노인에 불과해 ‘비운의 황태자’라고 불린다. 경영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는 평을 듣는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본래 삼성그룹을 이끌어갈 인물로 꼽혔다.

삼성의 모태기업인 제일제당 대표이사, 삼성물산과 삼성전자의 부사장, 삼성문화재단 이사 등 그룹의 주요 직위에 올라 후계구도를 굳히는 듯 했다.

1966년 삼성그룹 계열사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이병철 회장 대신 삼성그룹을 맡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이 삼성 참모진에게 “맹희 부사장에게 세 번 요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내게 가져오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당시 이맹희의 위치를 보여 준다.

그룹을 맡은 지 6개월만에 이병철 회장에게 “그룹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동생 이창희가 이병철 회장을 몰아내려고 청와대에 투서를 보낸 사건으로 후계자 구도가 변했다. 이병철 회장은 투서의 주범이 이맹희라고 믿었고 이후 이병철 회장과 부자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1973년 이병철 회장이 이맹희를 불러 종이에 현재 맡고 있는 직함을 모두 적어보라고 했다. 이병철 회장은 “니가 할 수 있는 것만 해라”라고 하며 14개 회사의 직함을 지웠고 이 때 후계구도에서 공식적으로 밀려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맹희는 이 같은 아버지의 결정을 물러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일본으로 떠나면서 삼성그룹과 거리를 둔 삶을 살았다. 겨울은 사냥을 하고 여름은 워커힐에서 말을 타는 등 방랑의 시간을 보냈다.

1993년 제일비료를 다시 세워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했다. 장남 이재현이 CJ제일제당을 맡으며 삼성에서 계열분리해 나왔으나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2012년부터 동생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상대로 상속 소송을 제기했다. 여동생 이숙희가 힘을 보탰지만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하고 상고는 포기했다.

소송을 진행하다가 폐암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암이 다른 부분으로 전이돼 투병생활을 이어오다가 2015년 8월14일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에서 김창성 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온 마음 약한 아버지였다”고 평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이채욱 CJ그룹 대표는 “각종 궂은 일을 자처하며 열정적으로 일을 사랑했지만 순간 그 모든 공적과 영화를 내려놓고 가족과 회사를 위해 희생했다”고 평했다.

이맹희는 사후 CJ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60년 한일은행에 입행해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대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지목되며 삼성전자, 중앙일보, 삼성물산, 제일제당, 신세계, 동방생명 등에서 부사장, 전무, 상무 등 17개 직책을 맡았다.

1965년 안국화재 상무이사로 재직했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이병철 회장의 권유로 잠시 삼성그룹의 회장을 대행하기도 했다.

1968년 삼성물산 부사장, 삼성전자 부사장,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사장, 미풍산업 부사장, 성균관대학재단 상무, 중앙일보 부사장, 삼성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1973년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17개의 직함이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 부사장 등 3개로 줄었다.

1987년 이병철 회장이 사망한 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제일비료 회장을 맡았다. 2015년 8월 사망한 뒤 CJ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 학력

1944년 대구수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경북중학교를 졸업했다.

가쿠슈인 대학을 졸업했다.

1954년 도쿄 농업대학을 졸업했고 1956년 같은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농업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7년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경제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 가족관계

삼성 창업주인 아버지 이병철과 어머니 박두을의 3남5녀 중 장남이다.

남동생은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다.

누나로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있고 여동생으로 이숙희, 이순희, 이덕희가 있다.

부인인 손복남 CJ고문 사이에서 2남1녀를 두었다.

장남은 이재현 CJ그룹 회장이고 장녀는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차남은 이재환 재산커뮤니케이션즈 대표다.

◆ 상훈

◆ 상훈

어록


“삼성은 내가 3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 정열을 불태운 곳이다. 척박한 정치와 경제 풍토 속에서 나는 삼성이라는 기업에 내가 가진 능력과 지식 그리고 젊은 오기와 욕심을 모두 쏟아 부었다.” (1993년 출간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나는 한때 삼성을 운영했던 사람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삼성에서 물러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부사장급의 직함만 17개를 가지고 있었다.” (1993년 출간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나도 모반에 개입이 된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묵인은 했으리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 (1993년 출간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그때라도 자존심을 죽이고 매달렸으면 어떤 형태로든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차마 그러고 싶지 않았다.” (1993년 출간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최근 건희가 어린애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앞으로 삼성을 누가 끌고 나갈건지 걱정이 된다. 건희는 현재까지 형제지간에 불화만 가중시켜왔고 늘 자기 욕심만 챙겨왔다. 한 푼도 안주겠다는 그런 탐욕이 이 소송을 초래했다.” (2012/04/24,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며)

◆ 평가

태어날 때는 황태자였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에 한낱 외로운 노인에 불과해 ‘비운의 황태자’라고 불린다. 경영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는 평을 듣는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본래 삼성그룹을 이끌어갈 인물로 꼽혔다.

삼성의 모태기업인 제일제당 대표이사, 삼성물산과 삼성전자의 부사장, 삼성문화재단 이사 등 그룹의 주요 직위에 올라 후계구도를 굳히는 듯 했다.

1966년 삼성그룹 계열사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이병철 회장 대신 삼성그룹을 맡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이 삼성 참모진에게 “맹희 부사장에게 세 번 요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내게 가져오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당시 이맹희의 위치를 보여 준다.

그룹을 맡은 지 6개월만에 이병철 회장에게 “그룹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동생 이창희가 이병철 회장을 몰아내려고 청와대에 투서를 보낸 사건으로 후계자 구도가 변했다. 이병철 회장은 투서의 주범이 이맹희라고 믿었고 이후 이병철 회장과 부자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1973년 이병철 회장이 이맹희를 불러 종이에 현재 맡고 있는 직함을 모두 적어보라고 했다. 이병철 회장은 “니가 할 수 있는 것만 해라”라고 하며 14개 회사의 직함을 지웠고 이 때 후계구도에서 공식적으로 밀려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맹희는 이 같은 아버지의 결정을 물러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일본으로 떠나면서 삼성그룹과 거리를 둔 삶을 살았다. 겨울은 사냥을 하고 여름은 워커힐에서 말을 타는 등 방랑의 시간을 보냈다.

1993년 제일비료를 다시 세워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했다. 장남 이재현이 CJ제일제당을 맡으며 삼성에서 계열분리해 나왔으나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2012년부터 동생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상대로 상속 소송을 제기했다. 여동생 이숙희가 힘을 보탰지만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하고 상고는 포기했다.

소송을 진행하다가 폐암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암이 다른 부분으로 전이돼 투병생활을 이어오다가 2015년 8월14일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에서 김창성 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온 마음 약한 아버지였다”고 평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이채욱 CJ그룹 대표는 “각종 궂은 일을 자처하며 열정적으로 일을 사랑했지만 순간 그 모든 공적과 영화를 내려놓고 가족과 회사를 위해 희생했다”고 평했다.

이맹희는 사후 CJ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 기타

저서로 1993년 청산출판사에서 출간된 <하고싶은 이야기>와 <묻어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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