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 문재인 대통령

'촛불 대통령', 온화한 원칙주의자 [2018년]
김디모데 기자 Timothy@businesspost.co.kr 2017-12-29 08: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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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문재인 대통령
▲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은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다.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국가비전으로 삼고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다.

1953년 1월24일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명진리에서 태어나 부산 영도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 재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됐으며 출소 뒤 군에 입대해 특전사에서 복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 불렀을 정도로 노 전 대통령과 가까웠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부산에서 당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참여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장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상임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했다.

부산 사상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대선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나왔으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졌다.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이지만 한 번 결정한 원칙을 잘 바꾸지 않는 원리원칙주의자다.

경영활동의 공과


△19대 대통령 당선과 국정운영
문재인은 2017년 5월9일 19대 대통령선거에 41.1% 의 득표로 2위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역대 최대인 17.7%포인트의 득표율 차이로 당선됐다.

촛불정신을 받들어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을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내걸고 대통령 직무를 시작했다.

국정 초반 인수위 없이 곧바로 업무를 시작하게 돼 어려움을 겪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를 꾸려 사실상 인수위의 역할을 대신했고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분과별로 국정과제를 선정해 7월 보고대회에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국가비전으로 제시하고 △국민이 주인인 정부 △더불어 잘사는 경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고르게 발전하는 지역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5대 국정목표로 정했다.

이에 따라 20대 국정전략과 100대 국정과제를 선정하고 487개 실천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사람 중심 경제를 전면에 내세워 일자리경제·소득주도경제·공정경제·혁신경제를 경제정책의 축으로 삼고 있다. 이 가운데 중심에 있는 것은 일자리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가계소득을 늘리고 이를 경제성장 동력으로 삼는다는 구상을 세웠다.

이에 따라 취임 후 1호 업무지시로 일자리위원회를 신설하고 청와대에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했다. 일자리 100일 계획, 일자리 5년 로드맵 등 일자리 정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또 6월에는 11조2천억 원 규모의 일자리 추경 예산을 편성해 집행했고 2018년도 예산안에도 공무원 9450명을 증원하는 방안이 담겼다.

탈원전·탈석탄과 신재생에너지 육성을 담은 에너지전환 정책 로드맵, 공공·공적주택 공급 확대를 추진하는 주거복지 로드맵, 지능화기술 연구개발과 인재 양성을 위한 4차산업혁명 대응계획 등을 주요정책으로 펼치고 있다.

사회분야는 적폐청산을 내걸고 국정농단 수사부터 권력기관 개혁까지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을 넘어 이명박 정권까지 적폐청산 대상이 되면서 야권에서 정치보복이라는 말도 나온다.

검찰에서 진행하고 있는 적폐청산 관련 사건은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방해 의혹,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청와대 및 국정원 보수단체 불법지원, BBK 관련 고발 등 10여 건이 넘는다. 이 와중에 국정원은 조직명을 대외안보정보원으로 바꾸고 수사권을 모두 포기하는 개혁안을 마련했다. 검경 수사권을 조정하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설치하는 검찰 개혁 방안도 추진 중이다.

외교·안보분야에서 당초 문재인이 북한과 대화하겠다는 입장이 강했으나 정부 출범 후 북한 핵실험과 11차례 미사일 발사가 이뤄지면서 남북관계가 완벽한 경색국면이 지속되고 있다.

문재인 역시 현재 상황은 대화보다 제재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며 11월과 12월 두 차례 대북 독자제재를 발표하기도 했다. 다만 북한에 태도변화를 촉구하는 발언은 이어가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보호무역 기조를 강화하고 있는 미국과 한미FTA 개정협상을 앞두고 있고 중국과는 지난 정부부터 이어오고 있는 사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외교부에서 한일 위안부합의 검토 결과를 발표한 뒤 사실상 위안부 합의 파기를 시사하면서 한일관계 역시 경색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러시아·아세안 등 다른 나라들과는 신북방정책·신남방정책을 통해 협력의 폭을 적극적으로 넓혀가고 있다.
[Who Is ?] 문재인 대통령
▲ 문재인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2017년 12월14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한중정상회담을 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
△박근혜 게이트와 대선후보 문재인
문재인은 2016년 하반기 박근혜 게이트가 빚어낸 긴박한 정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대선후보로서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2016년 11월 박근혜 게이트 정국에서 처음에는 신중론을 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 등 당내 2~3위권 대선후보들이 명확하게 탄핵을 요구하는 반면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한동안 지켰다.

그러나 2016년 11월15일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과 함께 전국적 퇴진운동에 나서겠다며 강경노선으로 전환했다. 2016년 12월9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2017년 3월10일 파면이 선고되는 과정에서 가장 수혜를 입은 후보로 평가됐다.

문재인의 대선후보 지지율은 2016년 11월에 20%대 초반이었는데 2017년 2월 초에 30%를 넘어선 뒤 3월 말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선두를 지켰다. 문재인이 제1야당의 주요 대선주자인 점과 원칙주의적 성향을 보여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척점으로 평가된 점 등 덕분에 지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정치권은 바라봤다.

2017년 4월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뽑기 위해 호남권, 충청권, 영남권, 수도권강원제주 등 네차례 실시된 권역별 순회경선에서 누적득표율 57.0%를 차지해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최성 고양시장을 제치고 결선투표 없이 본선으로 직행하면서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당대표 문재인과 인재영입
문재인은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시절 당내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해 ‘친노’의 한계를 보여줬다고 지적됐다. 그러나 인재영입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원내1당으로 올라서는 데 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년 12월 제18대 대선에서 패배한 뒤 6개월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당시 너무 빨리 정치일선에 복귀하려는 것 아니냐는 일부 지적도 나왔다.

야권 정치인으로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10.4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논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세월호 참사 정국 등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며 박근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문재인은 2015년 2월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박지원 후보를 제치고 대표에 올랐다. 이때 박지원 후보에 고작 3%포인트만 앞섰을 정도로 당내 장악에는 실패했다. 이 때문에 친노-비노 갈등이 불거지며 독선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문재인과 안철수 의원의 대립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분열하자 비주류의 사퇴론에 직면했다.

2015년 12월28일 당이름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바꿨다. 2016년 1월27일 대표에서 물러났다.

2015년 12월부터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아 외부인사를 영입했다.

그 결과 민주당은 2016년 4월 총선에서 123석을 얻어 새누리당을 제치고 원내1당에 올랐다. 당시 문재인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김병관 웹젠 이사회 의장, 이수혁 전 국정원 1차장,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김병기 전 국정원 인사처장,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서형수 전 한겨레 사장, 박주민 전 민변 사무차장 등을 더불민주당에 영입했다.

이 가운데 표창원 김병관 박주민 조응천 김병기 이철희 서형수 의원 등이 2016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 열풍을 이끌며 20대 국회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조응천 의원은 청와대에서 퇴직한 뒤 아내의 식당에서 일하던 시절 문재인이 그를 영입하러 찾아왔을 때 몇번이나 거절했는데도 ‘눈만 껌뻑 껌뻑거리며 도와달라던’ 문재인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해 결국 정치에 입문했다고 말한 일화가 있다.

2016년 1월1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멘토’로 불렸던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삼고초려 끝에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김종인 위원장을 영입하면서 중도층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도 민주당의 총선 승리에 유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재인과 김종인 전 위원장은 그 뒤 관계가 악화됐다. 김 전 위원장이 총선에서 공천 전권을 행사하고 문재인이 고립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총선 이후에도 총선승리의 공로 평가, 당대표 합의추대, 야권연대 등에서 시각차를 보였다. 결국 김 전 위원장은 2017년 3월8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18대 대선 패배
문재인은 18대 대선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맞붙었다. 지지율 조사에서 오차범위 안의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졌다.

2012년 4월11일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8월25일부터 9월16일까지 열린 국민참여경선에서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후보 등과 겨루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의 제18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선출됐다.

안철수 후보와 심상정 후보가 문재인을 지지하는 선언을 한 뒤 사퇴하는 등 범야권의 지지를 얻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지지율에서 다소 밀렸지만 당시 여론이 좌우로 사실상 양분되면서 대선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문재인의 지지율이 올랐다.

그러나 2012년 12월19일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약 100만 표 차이로 졌다. 당시 문재인은 1469만 표(48.0%)를 얻었는데 이는 탈락후보 사상 최다 득표이자 역대 대선후보들 가운데 두번째로 많은 득표다.

18대 대선에서 패배한 요인으로 독자적 리더십을 세우는 데 실패해 국민들에게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
문재인은 198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법조계 동업자로서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 문재인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했을 때 ‘법률가는 억울한 서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앤장 등 대형로펌의 영입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다면 노모를 모실 수 있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그해 부산으로 내려가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김광일 노무현 변호사 등과 함께 1981년 일어난 부림사건에 변호인을 맡은 것으로 언론에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부산에 1982년 내려왔고 부림사건은 그 전의 일이다.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일하면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1987년 대우조선 사건으로 노 변호사가 구속되자 문재인은 부산지역 변호사를 동원해 변호인단을 만들어 그를 변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권에 인도한 장본인이다.

1988년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치참여 요청을 받은 그는 "정치인 자질은 노무현씨가 훨씬 더 탁월하다"며 노무현 변호사를 추천했고 노무현 변호사는 이를 거듭 피하다 결국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가 몇 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는데도 “나는 참모용이고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고사했다.

노무현 후보의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했으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변호사 업무에 복귀할 뜻을 여러차례 밝혔다.

그러나 2003년 1월 노무현 당선자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고 하자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 제의를 수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흔들릴 때마다 문재인이 "정치를 끝까지 계속해 달라"고 애걸 반 압박 반으로 주문했던 만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이때 치아가 10개나 빠져 임플란트를 하면서 발음이 안 좋아졌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위기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2007년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에서 '왕수석', '왕의 남자'로 불리며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으로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국정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2인자로 주목받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23일 서거한 뒤 장례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다. 그 뒤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사법시험 합격과 사법연수원 시절
사법시험에 한차례 재수한 끝에 1980년 차석으로 합격해 사법연수원 12기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문재인은 10대 시절 역사학자를 꿈꿨지만 어려운 집안형편을 감안해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에 전액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1978년 2월에 제대한 직후 아버지 문용형씨가 59세로 별세하자 가장으로서 책임감과 아버지에게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79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시위 참가로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다가 2차 합격소식을 들었다.

1980년 사법시험 3차 면접시험을 볼 때 안전기획부 요원으로부터 지금도 옛날에 시위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는지 질문받자 “지금도 변함없다”고 대답했다. 최종적으로 합격했지만 훗날 원하던 판사 임용에서 탈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고승덕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김용덕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 사법연수원 12기를 차석으로 수료했다. 원래 성적은 수석이었으나 시위 전력 때문에 차석으로 순위가 바뀌었다고 한다.
[Who Is ?] 문재인 대통령
▲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월17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취임100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문재인은 70% 안팎의 높은 지지율과 정부여당의 공조체제로 1년차 국정 운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3분기 경제성장률이 7년3개월만에 최고치인 1.5%를 기록하면서 3%대 성장도 확실시된다.

하지만 2년차에는 1년차 정책으로 추진한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등의 결과가 나오면서 다소간 혼란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서 비롯되는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2년차 국정 지지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또 공무원 증원과 확장적 재정 등 사람중심 경제, 소득주도 성장 등도 2년차에서 평가받을 것으로 보인다. 일자리를 최우선 정책과제로 내세우고 있지만 11월 청년고용율이 역대 최고 수준인 9.2%까지 치솟는 등 고용지표가 좋지 않아 이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민간 일자리 창출과 투자 확대를 위해 혁신성장 정책의 중요성도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2년차에는 지방선거가 있는 점 역시 국정운영의 변수로 여겨진다.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 추진에 제동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 국회가 여소야대이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여당과 비슷한 의석을 확보하고 있어 국회 입법이 필요한 정책의 경우 원활하게 추진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더욱이 지방선거와 함께 국민투표에 붙이기로 한 개헌을 완수하는 것도 중요한 시대적 과제다. 30년만의 헌법 개정인 만큼 새로운 시대 상황과 국가 비전을 담아야 하는데 아직 개헌 방향과 방법을 놓고 정치권에서 의견이 분분해 개헌안을 마련하는 과정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 1기 인사 가운데 지방선거 출마가 예상되는 이들도 있어 이에 따른 2년차 개각이 어떻게 이뤄질지도 주목된다. 정부 초반 인사에 어려움을 겪었고 새로 7대 비리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에 다음 인사에 더욱 관심이 쏠린다.

◆ 평가

합리적이고 중심이 잘 잡혀있어 안정된 성품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대통령 당선 이후 전국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임기 첫 해인 7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 모든 지역과 연령에서 과반 이상의 지지율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문재인의 강성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문꿀오소리'라 부르며 문재인의 모든 언행, 문재인정부 정책 전반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문재인과 관련된 물품이 큰 인기를 끄는 이른바 '이니굿즈' 열풍도 분다. 이니굿즈에는 청와대 기념품인 시계와 텀블러, 문재인 취임기념 우표, 문재인이 착용한 등산복과 신발, 넥타이, 안경 등 종류가 다양하다. 부인 김정숙씨와 관련된 의상 등도 '쑤기템'이라 해 덩달아 인기를 끈다.

이니굿즈 열풍은 중국에도 나타났다. 문재인이 첫 중국 국빈방문에서 아침식사를 한 베이징 조어대 근처 식당은 유타오(튀긴빵), 더우장(두유), 샤오롱바오(찐만두), 훈둔(만둣국) 등 문재인이 먹은 메뉴를 '문재인 세트메뉴'라는 이름으로 판매한다. 중국 SNS인 웨이보에는 관련 인증글이 잇따라 올라오며 인기를 나타냈다.

2017년 구글 연간 검색어 순위에서 연예인 설리에 이어 인물분야 2위에 올랐고 다음·카카오 검색어 순위에서는 인물 1위에 올랐다.

원리원칙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단 한 차례의 식사나 환담자리도 마련하지 않았고 청와대 내 부산경남 인맥을 대표했지만 경남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가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좌우명도 ‘어려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다. 원칙을 지킨다면 당장은 손해여도 결국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신념을 품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곱 살 어린 그를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한 기간이 길어, ‘친노의 수장’, ‘노무현의 비서실장’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로 사법시험 합격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을 꼽았다. 가장 아끼는 물건으로 법무법인 부산을 개업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업선물로 보내준 괘종시계를 들기도 했다. 이 시계에는 ‘증 노무현’이 새겨져 있다.

친노의 수장이자 노무현의 그림자로서 이미지가 너무 강한 것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정치경력이 길지 않기 때문에 친노 이미지 외에 정치적 자산이 많지 않아 당내 구세력의 흔들기에도 약한 편이다.

학구적이고 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달에 책 10권 가량을 읽으며 2017년 들어 대선유세로 바쁜 때인데도 한 달에 2~3권을 반드시 읽는다. 2017년 4월 기준으로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 저성장 시대, 기적의 생존전략’(김현철)을 최근에 읽은 책으로 들었다.

어떤 자료든 구석구석 읽어보고 토씨까지 그의 스타일로 고치는 습관이 있다. 변호사 시절 변론서를 작성하던 버릇이 남았다.

온화한 성품으로도 잘 알려졌다. 청와대에서 일하던 시절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로 사용할 정도로 공손하고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스로를 음식에 비유할 경우 ‘고구마’라고 밝혔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공격적인 발언으로 ‘사이다’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상대적으로 느리고 답답한 이미지를 얻자 “사이다는 밥이 아니지만 고구마는 든든하다”며 이미지 반전의 계기로 삼았다.

권력이나 이익을 탐해 지조와 양심을 파는 행위를 가장 꼴불견으로 본다고 말했다. 가장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 힘있고 가지고 잘나가는 사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행위를 들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성실로 본다. 인간의 삶을 한 마디로 정리할 경우 ‘모든 삶은 역사다’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스스로의 장점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을 들었다. 단점으로는 과도한 진지함과 결벽주의를 언급했다.

가장 좋아하는 한자성어로 ‘재조산하(再造山河)’를 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실의에 빠져있던 서애 류성룡에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적어 준 글귀로 ‘나라를 다시 만들다’는 뜻이다.

가장 좋아하는 영어단어는 Dream이라고 한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민본주의와 실용주의를 이끌어낸 점을 높이 샀다. 존경하는 현대 정치인으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을 꼽았다. 진보적이고 통합적인 리더십을 본받고 싶다고 말했다.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는 ‘광해, 왕이 된 남자’다. 영화를 관람했을 때 눈물을 흘려 화제가 됐는데 훗날 인터뷰에서 “영화 곳곳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 많아 감정수습이 안 됐다”고 밝혔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자연다큐멘터리도 즐겨 본다.

좋아하는 연예인은 가수 이은미씨와 배우 송강호씨다. 좋아하는 노래는 '꿈꾸는 백마강'이다.

대학생 시절 별명은 알랭 들롱(프랑스 영화배우)이었다고 한다.

풍산개 ‘마루’와 ‘깜’, 고양이 ‘찡찡이’와 ‘뭉치’를 키우고 있다. 마루와 찡찡이는 문재인과 함께 청와대에 입주해 퍼스트독(First Dog), 퍼스트캣(First Cat)이 됐다. 청와대 입주 후에 유기견 ‘토리’도 새로이 입양했다.

키는 172센티미터, 몸무게 67킬로그램에 신발 사이즈는 260밀리미터다. 혈액형은 B형이다.

회와 해산물을 좋아한다. 부엌일은 잘 하지 않고 가끔 라면을 직접 끓여먹는 정도다.

취미는 등산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세차례 다녀온 것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꼽았다. 2016년 6월 12년 만에 네팔로 떠나 지진피해 현장을 방문한 뒤 이전에 마치지 못했던 히말라야 트레킹을 완주하고 귀국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 목표로 자동차 여행을 들었다. 아무런 일정이 없는 날에는 책을 읽거나 등산하며 사색한다고 밝혔다.

주량은 소주 1병이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2004년에 청와대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로 히말라야 트래킹을 떠났을 때 끊었다. 산책으로 스트레스를 풀며 밭일이나 풀뽑기 등의 노동도 즐긴다.

천주교 세례명은 디모테오다. 초등학교 시절 사탕과 과일을 준 수녀들에게 감화돼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문재인의 가족은 가난했고 학교 위 ‘신선성당’에서 자주 배급을 받았다. 그러나 불교와 개신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친 문용형씨는 당시 대표적 저항잡지인 ‘사상계’를 읽고 이웃 대학생에게 한일회담 반대이유를 설명하는 등 사회의식이 깊었다. 그는 “아버지가 나의 사회의식, 비판의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Who Is ?] 문재인 대통령
▲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3월12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신임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9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1980년 제 22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1982년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1984년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학과 강사로 일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이 됐다. 부산지방변호사 인권위원장을 역임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부산지부 대표를 거쳐 경남지부 대표를 맡았다.

1994년 노동자를 위한 연대 노동상담소장을 맡았다.

1995년 법무법인부산 대표변호사가 됐다.

1996년 부산 YMCA 이사를 역임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노동자를 위한 연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부산시교육청 행정심판위원을 지냈다.

2003년~2004년 2월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일했다.

2004년 5월~2005년 1월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맡았다. 2007년 3월~2008년 2월 대통령비서실 실장을 역임했다.

2007년 8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상임이사가 됐다. 2010년 8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2011년 혁신과통합 상임대표가 됐다.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거쳐 2012년 5월~2016년 5월에 제19대 국회의원(부산 사상구, 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으로 일했다.

2012년 12월까지 민주통합당 대표대행을 맡았다. 2012년 12월 제18대 대통령선거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 패했다.

2012년 7월~2014년 5월 제19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2014년 6월~2016년 5월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2015년 2월~2015년 12월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를 맡았다. 2015년 12월 새정치민주연합 인재영입위원장으로 일했다.

2015년 12월~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맡았다. 2015년 12월~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을 역임했다.

2016년 1월27일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에서 물러나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을 맡았다.

2017년 4월3일 더불어민주당의 제19대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2017년 5월10일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 학력

1965년 부산 남항초등학교, 1968년 경남중학교, 1971년 부산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2년 재수를 거쳐 경희대학교 법학과(당시 법률학과)에 문과 수석으로 입학했다. 경희대학교는 당시 그에게 4년 전액장학금을 약속했다.

1975년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경희대에서 제적당했다.

1980년 경희대학교를 졸업했다.
[Who Is ?] 문재인 대통령
▲ 경희대 재학시절의 문재인 대통령과 아내 김정숙씨. MT를 가는 기차안에서 머리를 빗겨주고 있다.
◆ 가족관계

부친 문용형씨는 함경남도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이다. 원래 흥남시청에서 농업계장, 농업과장으로 근무했으나 한국전쟁 시기 아내 강한옥과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로 남하해 문재인을 낳았다. 문재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았다.

문재인은 2남3녀 중 장남이다. 누나 문재월씨와 여동생 문재성씨는 주부이고 남동생 문재익씨는 원양어선 선장이다. 막내 여동생 문재실씨는 모친 강한옥씨를 모시고 부산 영도에서 살고 있다.

1981년 대학교 2년 후배인 김정숙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문준용) 1녀(문다혜)를 두었다. 자녀교육관으로 자식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들 문준용씨는 2011년 광주비엔날레에 '마쿠로쿠로스케 테이블'이라는 작품을 출품한 미디어아티스트다. 문준용씨의 장인은 목사로 일했다. 딸 문다혜씨는 회사원이다.

부인 김정숙씨와 인연은 학생운동에서 시작했다. 시위 도중 문재인이 최루가스를 맡고 실신했을 때 대학 2년 후배인 김정숙씨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 것이 계기가 됐다.

김정숙씨는 군대에 간 문재인을 처음 면회할 때 흔히 가져가는 통닭 대신 안개꽃을 한아름 들고 왔다는 일화가 있다. 프로포즈도 김정숙씨가 했다.

문재인의 처가는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장인과 장모가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한복집을 했으며 문재인 결혼 당시에 강화도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 상훈

특전사 복무 기간 사령관 정병주와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여단장)으로부터 폭파과정, 화생방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받았다.

사법연수원 재학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을 수상했다.

2014년과 2015년 제16·17대 백봉신사상을 수상했다.

◆ 기타

1975년 8월 강제징집돼 육군에 입대했다. 경남 창원 39향토보병사단 훈련소를 거쳐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서 복무했다. 수중폭파조에 배속되어 공중낙하, 수중침투, 천리행군 등을 거뜬히 치러낸 특A급 사병이었다.

1976년 상병시절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때 미루나무 제거 작전 ‘폴 버니언’에 참가했다. 1978년 병장 만기 제대했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 여단장은 전두환 준장, 대대장은 장세동 중령이었다.

2017년 8월25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고위 공직자 재산등록사항에 따르면 18억2246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본인과 아내, 어머니 이름의 예금과 홍은동 자택, 양산 대지 등 부동산, 저서 운명의 지적재산권 등이 포함됐다.
[Who Is ?] 문재인 대통령
▲ 문재인 대통령의 특전사 시절.
어록


“민주적인 나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는 국민이 요구한 새 정부의 책무다. 나는 이 책무를 다하는 것을 나의 사명으로 여긴다. 다른 욕심이 없다. 이 책무를 절반이라도 해낼 수 있다면 나의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2017/11/01, 2018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제출 국회 시정연설)

“우리 국민들은 이번 공론화 과정을 통해 한층 성숙한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우리 국민들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갈수록 빈발하는 대형 갈등과제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이번 공론화 경험을 통해 사회적 갈등 현안들을 해결하는 다양한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이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2017/10/22,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결과에 대한 입장)

“혁신성장은 소득주도 성장과 함께 새로운 경제성장을 위한 새정부의 핵심 전략이다. 혁신적 창업과 신산업 창출이 이어지는 활력 넘치는 경제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그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2000년대 정보화 시대를 우리 경제도약의 기회로 삼았던 것처럼 4차산업혁명 시대의 미래를 우리가 만들어 나가자.” (2017/10/11, 4차산업혁명위원회 1차 회의 연설)

“부패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권력도, 경제도, 안보도 부정으로 힘을 잃고 부패로 무너졌다. 부정부패 척결을 새 정부의 모든 정책의 출발로 삼겠다. 부정부패의 척결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다. 문재인정부의 청와대도 예외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의 투명성을 지키는 것이 대한민국 반부패의 출발이라는 자세를 가지고 엄정하게 반부패대책을 추진해주기 바란다. (2017/09/26, 제1차 반부패 정책협의회 모두발언)

“지난 겨울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이야말로 유엔정신이 빛나는 성취를 이룬 역사의 현장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했다. 민주주의의 실체인 국민주권의 힘을 증명했고 폭력보다 평화의 힘이 세상을 더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대한민국의 새 정부는 촛불혁명이 만든 정부다. 나는 지금 그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서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시작은 늦었지만 세계 민주주의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줬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다.” (2017/09/22, 제72차 유엔총회 기조연설)

“한국은 신북방정책의 비전을 갖고 있다. 신북방정책은 극동지역 개발을 목표로 하는 푸틴 대통령님의 신동방정책과 맞닿아 있다. 신북방정책과 신동방정책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극동이다. 러시아와 한국 사이에 9개의 다리(9-Bridges 전략)를 놓아 동시다발적인 협력을 이루어나갈 것을 제안한다. 그 9개의 다리는 조선, 항만, 북극항로와 가스, 철도, 전력, 일자리, 농업, 수산이다. 우리가 함께 협력할 분야가 많다.” (2017/09/07, 동방경제포럼 기조연설)

“지난 100일 동안 국가운영의 물길을 바꾸고 국민이 요구하는 개혁과제를 실천해 왔다. 취임사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상처받은 국민의 마음을 치유하고 통합해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새 정부 5년의 국정운영 청사진을 마련하는 일도 차질 없이 준비해왔다. 국가의 역할을 다시 정립하고자 했던 100일이었다.” (2017/08/17, 취임 100일 기자회견)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으며,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위적인 통일을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통일은 쌍방이 공존공영하면서 민족공동체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다. 통일은 평화가 정착되면 언젠가 남북간의 합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이다. 나와 우리 정부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평화다.” (2017/07/06, 독일 쾨르버 재단 초청 연설)

“그간 한국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성장의 혜택이 일부 계층에만 집중되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결국은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이 됐다. 우리 정부의 새 경제정책은 ‘사람중심의 경제’를 지향한다. 국민과 가계를 경제정책의 중심에 놓겠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핵심은 일자리로 일자리를 늘리면 가계소득이 높아진다. 늘어난 가계소득이 내수를 활성화해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경제성장이 다시 일자리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려는 것이다.” (2017/06/28, 한미 비즈니스 서밋 기조연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의 추가 도발을 중단한다면 북한과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설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북한의 호응을 촉구한다. 저는 무릎을 마주하고,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기존의 남북간의 합의를 이행해 나갈지 협의할 의사가 있다.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 그리고 북미관계의 정상화까지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2017/06/15, 남북정상회담 17주년 기념식 축사)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성장의 결과 일자리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늘려 성장을 이루는 경제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현재의 실업대란을 이대로 방치하면 국가재난 수준의 경제위기로 다가올 우려가 있다. 지금 당장 추경을 편성해서라도 고용을 개선하고, 소득격차가 더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2017/06/12, 추가경정예산안 국회 시정연설)

“대한민국 대통령의 새로운 모범이 되겠다. 국민과 역사가 평가하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그래서 지지와 성원에 보답하겠다. 깨끗한 대통령이 되겠다. 빈손으로 취임하고 빈손으로 퇴임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되어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 국민 여러분의 자랑으로 남겠다.” (2017/05/10, 제19대 대통령 취임선서)

“예측했던대로 방송3사 출구조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대로 승리한다면 오늘의 승리는 간절함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정권교체를 염원했던 국민의 간절함, 두 번째로는 국민의 간절함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던 우리(더불어민주당)의 간절함이 승리한 것이다." (2017/05/09, 대통령선거 직후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

“당시 한국은 독재정권 치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역할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이젠 한국 국민 스스로가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 1980년 당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다 안했다는 하는 식의 과거의 문제에 묶여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민주주의는 국민들 힘으로 성숙시킬 것이다.” (2017/05/07, 미국 언론인인 팀 셜록이 1980년 당시 미국이 광주지역 계엄군 동원을 제지하지 않은 것을 사과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지금은 우리가 선거 시기이기 때문에 '나야말로 정권교체 후보고, 정권교체를 선택해 주셔야 한다, 정권연장 후보는 심판해야 된다' 이렇게 캠페인을 하고 있지만. 저는 선거가 끝나고 나면 이제는 선거 과정의 그런 것은 다 잊어버리고 어떤 야당하고도 협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7/05/01, C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주도해 북한의 선(先) 행동론 대신 북한과 미국을 포함한 관련 당사국들의 '동시 행동'을 이끌어 내겠다. 중국 역할론에 기댈 것이 아니라 한국 역할론을 실천적 전략으로 삼아 정책의 새 틀을 짜야 한다. 우리의 주도로 핵 없는 한반도를 만들겠다.”(2017/04/23, 서울 여의도 헌정기념관에서 '한반도 비핵평화구상' 발표 기자간담회를 열고)

“산업화 시대의 경제관행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게 바꾸겠다. 그간의 경제정책은 기업에 사회적 자원을 몰아주는 것이 시작이었다. 기업에 투자하면 국민에게 혜택이 전달되는 낙수효과를 기대하고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확인됐다. 사람에게 투자해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살리는 사람중심의 경제성장 구조로 바꾸겠다.”(2017/04/12, 문재인이 자신의 경제구상을 담은 이른바 '제이(J)노믹스'를 공개하며)

“오늘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역사를 시작한다. 분열의 시대와 단호히 결별하고 정의로운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겠다. 이번 대선은 보수 대 진보의 대결이 아니다. 정의냐 불의냐의 선택이다. 상식이냐 몰상식이냐의 선택이다. 공정이냐 불공정이냐 선택이다. 위대한 국민의 나라로 가야 한다. 내가 정치를 결심한 목표도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 주류를 바꾸고 싶었다. 이제 권력의 주류는 시민이어야 한다. 깨끗해서 자랑스러운 대통령, 공정해서 믿음직한 대통령, 따뜻해서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다.” (2017/04/03,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수락 연설에서)

“진정한 통합은 적폐를 덮고 가는 봉합이 아니다. 적폐를 확실히 청산하면서 민주주의 틀 안에서 소수의견도 존중하고 포용하는 원칙 있는 통합이 중요하다.” (2017/03/12,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안심시키는 것이 안보라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야 말로 안보에 유능한 세력이다. 그때 우리 국민들은 이제 남북 간에 두 번 다시 전쟁은 없을 것이다, 통일은 언제일지 몰라도 이제 평화는 확실히 구축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불과 1년 만에 천안함과 연평도, 최근의 목함지뢰 사건까지 남북 군사적 충돌 때문에, 북의 공격 때문에 우리 NLL과 비무장지대, 군사 분계선이 뻥 뚫렸다. 많은 국민과 장병이 아까운 목숨 잃고 다치는 사이에 북핵은 갈수록 고도화됐고 이제는 무기화단계에 이르렀다.” (2017/02/22,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진행된 ‘더불어국방안보포럼’에 참석해)

“‘문재인이 대세’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실제로 민심을 확인해 보니 내가 대세인 것이 맞다. 문재인 대세론은 정권교체의 대세 속에서 나를 정권교체의 적임자로 국민들이 인정해준 것이다. ‘반문재인 연대’나 ‘제3지대’ 등의 움직임은 결국 정권교체를 반대하는 연대, ‘정권연장 연대’에 지나지 않는다.” (2017/01/31, 서울 여의도 인근의 카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 개 정당으로 정권교체가 불가능하고 여러 정당과의 연대가 필요하면 연정(연립정부)도 가능하다. 연정이 정당 책임 정치와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드시 우리 당의 대선주자로 한정할 필요가 없으며 정권교체 대의에 함께 힘을 모으는 정당과 사람이라면 좋다고 생각한다. 야권의 통합·연대·단일화에 대해 나와 민주당은 계속해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또한 앞으로 경선 과정에서 내가 ‘친문’에 갇힌 세력이 아님을 보여주겠다. 캠프 구성을 보면 그간 친문이라고 할 분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2017/01/23, 광주 국민생활관에서 열린 광주전남언론포럼에서)

“작품은 예술가의 자유이고 존중돼야 하지만 그 작품이 국회에서 정치인의 주최로 전시된 것은 적절치 않았다. 예술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은 다르다. 예술에서는 비판과 풍자가 중요하지만, 정치에서는 품격과 절제가 중요하다.” (2017/01/24,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최한 국회 의원회관 전시회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누드화가 전시돼 물의를 빚자)

“당신들은 촛불과 일상으로 이 나라의 주인임을 증명했고, 반세기의 적폐가 강요한 절망에 오직 희망으로 응답했다. 2017년 대한민국은 당신들을 닮아갈 것이다.” (2016/12/31, 페이스북에 남긴 2017년 신년사에서 국민들에게 보낼 메시지로)

“특전사 출신인 나보고 종북이라는 사람들이 진짜 종북이다. 오늘부로 종북의 의미를 새로 규정한다. 군대 피하는 사람들, 방산비리 사범들, 국민을 편 갈라 분열시키는 가짜보수 세력이 종북이다.” (2016/12/28, 자신의 싱크탱크인 국민성장정책공간이 국회도서관에서 ‘책임안보, 강한 대한민국’을 주제로 주최한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제2차 포럼에 참석해)

“남북문제에 관한 한, 저도 참여정부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 국민을 편가르고 증오하게 만드는 새누리당의 사악한 종북공세에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 이번에는 반드시 끝장을 보겠다. 더 이상 구시대적 색깔론이 이 땅에 발붙일 수 없도록 결연한 의지로 맨 앞에서 싸우겠다.” (2016/10/13, 송민순 회고록 논란을 반박하며)

“우리 경제를 살리는데 재벌 대기업이 여전히 견인차 역할을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재벌 대기업이 자신의 성장이나 이익만을 도모하지 말고 우리 경제를 공정한 경제로 만들고 우리 경제를 혁신해서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드는 노력을 해달라.” (2016/10/13, 4대기업 경제연구소장 간담회)

“이제 자유로워질 것이다. 19대 국회에서 대선출마도 했고 당 대표도 했고 총선도 치렀다. 제 평생의 정치를 압축적으로 경험한 국회였다. 이렇게 마치니 시원섭섭하다.” (2016/05/19,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참석하며)

“호남의 정신을 담지 못하는 야당 후보는 이미 그 자격을 상실한 것과 같다. 호남이 나에 대한 지지를 거두겠다면 미련없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 대선에도 도전하지 않겠다.” (2016/04/08, 총선을 앞두고 광주를 방문해 기자회견에서)

“온갖 흔들기 속에서도 혁신의 원칙을 지켰고, 혁신을 이뤘다. 계파공천과 밀실 공천이 불가능한 공정한 공천 절차를 마련했고,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드렸다. 인재영입을 통한 변화의 큰 물결도 시작됐다. 못한 것은 통합인데, 통합에 물꼬를 틔우기 위해 제가 비켜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고위원들과 상의해, 선대위로의 권한 이양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백의종군 하겠다는 각오다.” (2016/01/19, 신년 기자회견에서 당대표 사퇴 의사를 밝히며)

“한반도의 새로운 경제 지도를 그려야 한다. 우리 경제활동 영역을 북한과 대륙으로 확장해야 한다. 한반도가 더 이상 대륙의 변방이나 해양의 변방이 아닌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교량국가가 되어야 한다. 지난 5년 우리 발목을 스스로 잡아왔던 5.24 조치를 해제하고 뱃길과 육로를 열어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교류협력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2015/08/15, 광복 70주년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제시하며)

“지난 한달, 국민이 메르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정부와 대통령은 국민 곁에 없었다. 뒷북대응과 비밀주의로 국민의 혼란만 가중시켰고, 정부의 컨트롤타워는 작동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완벽하게 실패했다.” (2015/06/26, 박근혜 대통령의 메르스 무능과 거부권 행사에 대한 우리당의 입장 대국민담화에서)

“민주주의, 서민경제, 계속 파탄낸다면 저는 박근혜 정부와 전면전을 시작할 것이다.” (2015/02/08,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 당대표 수락연설에서)

“세월호만 침몰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격이 침몰하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 침몰했다고 생각한다.” (2014/05/04,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을 방문하여)

“새누리당이란 절대강자가 있는 상황에서 약한 정파들끼리의 연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2014/01/28,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지방선거의 야권연대을 두고)

“안녕하지 못한 정치가 고귀한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 그 분이 죽음으로 말하려던 뜻이 아프게 와 닿는다.” (2014/01/03, 국정원 대선개입 특검을 요구하며 서울역에서 분신한 이남종씨의 빈소에 조문하여)

“실무자들을 괴롭히지 말고, 나를 소환하라. 국민이 원하는 것은 진실규명을 빨리 끝내고 소모적 논란과 정쟁에서 벗어나 정치가 민생으로 돌아오게 하라는 것이다.” (2013/10/10, 노무현 정부 NLL 회의록 논란에 대해 검찰이 당시 실무자들을 소환하자)

“참여정부에 있으면서 5년 내내 노 전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봤고, 그때의 경험이 오히려 장점이 됐다. 그 누구보다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2012/09/14,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초청 토론에서 손학규 후보가 정치경험 부족에 대해 언급하자)

“소수 특권층의 나라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주인인 우리나라, 네 편 내 편 편가르지 않고 함께 가는 우리나라, 우리'라는 말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 반칙과 특권이 지배하는 암울한 시대와 최악의 정부가 나를 정치로 불러냈다. 시민과 동행하는 정치로 반드시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를 이뤄내겠다.” (2012/06/17,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제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내 별명 중 노무현의 그림자가 가장 마음에 든다.”(2012/01/09,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말하며)

“당신(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 같다.” (2011년 출간한 자서전 '운명'에서)

“국민이 이명박 후보를 뽑을 때 도덕성에 문제가 있더라도 경제는 잘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성장률, 고용, 국가채무 규모 등 어느 하나 참여정부보다 나은 게 없다.” (2011/02/11,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보수층이 참여정부의 경제문제를 추궁했다는 지적에)

“국정원의 국내사찰을 금지하자는 것은 국정원의 기능을 법에 따라 제 위치로 찾아주자는 것.” (2003/01/24, 기자들과 만나 국정원 장기개혁에 대해 논의하며)

“앞으로도 정치를 할 생각은 없다. 정치 쪽은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펼치고자 하는 새정치, 여러가지 개혁에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부족한 부분이나마 참여하기로 했다. 노 당선자에게 이제 빚을 갚고 싶다. 정치를 잘 모르며 민정과 사정, 제도개혁, 인사검증 등 중요한 민정수석의 업무를 잘 감당할지 걱정이 된다. 지금은 나서지 않고 묵묵히 배우겠다.” (2003/01/23,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내정된 후, ‘정치에 거리를 두다 이번에 특별히 민정수석을 맡은 계기’를 말하며)

“정치에 뜻이 없다.” (2002년 6.13 지방선거 때 노무현이 부산시장 후보로 나서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법률가는 보통 서민들이 겪는 사건들 속에서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아야 한다.” (1982년 사법연수원 수료 후 대형 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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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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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빈
헤이 모두들 안녕
   (2018-05-29 11:30:01)
DKSGUS
DK RMFODT>






   (2018-05-29 11:28:59)
문재인은문제인
문재인이 원칙주의자??

지금 하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2018-01-01 17:54:49)
기회균등
입으론 `서민을 위하여`
행동은 `서민은 개돼지`

겉으론 `사람이 먼저다`
실제론 `내자식이 먼저다`

이름은 `더불어 민주당`
내용은 `우리끼리 만만세당`

말로는 `양심세력`
알고보면 `양심불량`

문재인은 각성하고
민주당은 반성하라!!

니들만 사람이냐 서민도 사람이다
대입정시 확대하고 사법시험 살려내라!!
   (2017-12-29 19:5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