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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사회학, 왜 한국어에만 '억울하다'가 있을까

백우진 smitten@naver.com 2017-08-29 14: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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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모의 언어에는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십 개로 발달해 있듯이...”

“예를 들면 이누이트어(에스키모의 언어)에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400개나 있기 때문에 에스키모가 훨씬 섬세하게 눈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사회학, 왜 한국어에만 '억울하다'가 있을까
▲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국 편집위원.

“가장 흔한 예로 에스키모는 ‘눈’을 가르키는 단어가 500개이며 서구 도시인과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인용문구에서처럼 '에스키모의 눈' 이야기는 언어의 상대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자주 거론된다. 언어의 상대성이란 언어가 사회의 여러 환경을 반영하고 나아가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인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에스키모 공동체에 눈을 뜻하는 단어가 많아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눈을 세분해 인식할 수 있다는 언어의 상대성 이론은 ‘사피어-워프 가설’이라고도 불린다. 

옛날에 사람들은 단어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언어의 상대성은 단어가 사고에 미치는 힘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 한국어의 ‘억울하다’, 일본어에는 없어 

책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에는 언어의 상대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책은 에필로그에서 '억울하다'는 개념과 단어로 한국과 일본을 비교한다. 

저자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모두 '억울(抑鬱)'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뜻은 다르다고 전한다. 한국에서 ‘억울하다’는 억울할 때 쓰는데, 일본에서는 ‘억울’을 심하게 기분이 침체된 상태를 가리키는 데 쓴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한일사전을 검색하면 '억울하다'의 대응어로 ‘悔しい(구야시이)’가 많이 제시된다”며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두 단어는 맥락과 뉘앙스가 다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어의 ‘억울하다’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남의 잘못으로 자신이 안 좋은 일을 당하거나 나쁜 처지에 빠져 화가 나거나 상심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반해, 일본어의 ‘구야사이’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남과의 경쟁에서 패하거나 남이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여 분하거나 유감의 심정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심리상태는 그래서 파장이 크게 차이가 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억울한 한국사람은 남을 원망하는 반면 억울한 일본사람은 설욕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분발한다. 

일단 나는 저자의 착안이 반가웠다. 나도 ‘억울하다’는 낱말이 다른 언어와 비교한 한국어의 차이 중 하나라고 생각해왔다. 

‘억울하다’는 말은 일본어에는 물론 영어에도 없다. 한영사전을 찾아보면 ‘억울하게 남의 죄를 뒤집어쓰다’는 ‘find oneself in the sorry position of being charged with another's crime’이라고 길게 번역된다.

◆ 언어는 사회문화를 반영, 영어에는 ‘때’가 없어

그러나 나는 두 단어의 파장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언어의 상대성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단어에서 태도와 행동을 파악하기보다는 그 단어가 왜 배태됐는지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어는 사회를 반영한다. 어떤 사회에 있는데 다른 사회에는 없는 단어가 있다. 예를 들어 ‘때’에 해당하는 한 단어가 영어에는 없다. 영어로 때를 표현하려면 ‘dirt and dead skin cell’이라는 식으로 풀어내야 한다. 

영어에 ‘때’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은 영어권 사회 사람들의 몸에는 때가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어권에는 때를 미는 문화가 없음을 뜻한다. 

한국에는 일본과 영어권에는 없는 ‘억울하다’는 낱말이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유독 억울해하는 것은 아니다. 또는 비슷한 상황에서 한국 사람들이 유독 억울해하면서 이 단어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 사회에는 사람들을 억울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구조나 문화가 있어서 그런 경우가 다른 문화권보다 더 자주 발생한다고 봐야 한다. 

조선시대는 조선시대대로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제 강점기 때대로 독재시대에는 독재시대대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수탈하고 고문하고 처벌하고 죽이며 억울하게 했다. 

어느 사회 사람들의 타고난 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억울해하는 사람들을 줄이려면 억울하게 만드는 제도와 문화를 없애야 한다.

◆ ‘에스키모의 눈 500가지’는 과장

한편 언어의 상대성을 뒷받침한 에스키모의 눈 이야기는, 예컨대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500개라는 주장은 과장이다. 에스키모 언어는 포합어로, 단어에 접사를 붙여 구(句)는 물론 문장도 만든다. 한 단어로 보이는데 한 문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에스키모 언어에서 눈을 가리키는 단어 중 상당수는 단어라고 보기 어려운 부류다. 이를테면 ‘녹다가 다시 얼어붙은 눈’이 에스키모어에서는 한 단어처럼 쓰이지만 이 표현이 굳어서 계속 통용되는 게 아니라 같은 대상을 다른 사람들은 ‘녹다 만 눈’이라거나 ‘눈 얼음’이라고 한다면 ‘녹다가 다시 얼어붙은 눈’은 단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더 재미난 부분은 연구자들은 에스키모어의 눈을 표현하는 단어의 수를 명시하지 않았는데 전문 연구자가 아닌 필자들이 그 수를 점점 더 불렸다는 사실이다. 

에스키모 사람들이 아무래도 눈에 대해 좀 더 많이 얘기하고 눈에 대한 감각이 섬세할 것이다. 그러나 에스키모어에는 다른 언어보다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현격하게 많다는 주장은 과장이지 싶다. 

<자료>
위키피디아, 눈을 표현하는 에스키모 단어들 https://en.wikipedia.org/wiki/Eskimo_words_for_snow
 

백우진은 호기심이 많다. 사물과 현상을 종횡으로 관련지어 궁리하곤 한다. 책읽기를 좋아한다. 글쓰기도 즐긴다. 책 『백우진의 글쓰기 도구상자』『글은 논리다』『안티이코노믹스』『한국경제실패학』『나는 달린다, 맨발로』를 썼다.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 포브스코리아, 아시아경제 등 활자매체에서 기자로 일했다. 마라톤에 2004년 입문했고 풀코스 개인기록은 3시간37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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