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

오너 축구인 정치인으로 거듭 변신 [2016년-2]
임수정 기자 imcrystal@businesspost.co.kr 2016-12-26 08: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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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
▲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


정몽준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다.


현대중공업이 유례없는 경영위기에 빠지면서 정몽준의 경영복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정몽준은 현대중공업그룹의 지배구조개편을 통해 아들 정기선 전무로 경영권 승계를 준비하고 있다.

1951년 10월 부산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6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메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현대중공업 사장에 임명된 이후 현대중공업 대주주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위치한 울산시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이후 20년 동안 울산시 동구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대통령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과 후보단일화를 했고 그 뒤 한나라당에 입당해 당 대표를 지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회의원을 지내다 의원을 사퇴하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서울시장 새누리당 후보로 나섰으나 박원순 후보에 패배했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오래 맡았다. 한일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월드컵 유치에 기여했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에서 물러나자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부회장을 맡으며 아시아지역 FIFA부회장 선거에서 5선에 도전했으나 요르단 국왕의 동생인 알리 빈 알 후세인에 패배했다.

블래터 FIFA 회장이 부패스캔들에 휘말려 사퇴를 발표하자 FIFA 회장 출마를 선언했다. 정몽준은 FIFA 회장 선거로 정치적 재기를 꾀했으나 FIFA윤리위원회로부터 6년 자격정지를 당해 재기의 꿈이 무산됐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정몽준의 인생은 크게 현대중공업의 오너와 정치인, 축구인으로 평가받는다. 세 영역에서 모두 성공한 지위를 누렸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판단착오로 실패가 반복되면서 평가가 나빠졌다.

현대중공업에서 직접 경영에 나선 기간은 채 몇년이 되지 않는다. 현대중공업은 정몽준이 회사경영보다는 정치계와 축구계 활동에 집중하면서 소유와 경영인 분리된 전문경영인 체제를 일찍부터 구축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사장은 정몽준의 경영능력에 대해 “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으로 조선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불황에 허덕일 때 당시 정 사장은 시추선에 진출하는 등 조선 선종을 다양화하고 로봇 철탑 건설장비까지 업무영역을 넓혀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현대중공업은 전문경영인 체제 하에서 고속성장을 지속한다. 1990년대 후반 현대중공업의 매출은 6조 수준이었으나 2011년 50조 원을 돌파했다.

정몽준은 2013년 50년 지기였던 이재성 현대중공업 사장을 회장으로 올려 현대중공업의 경영권을 맡긴다. 그러나 이재성 회장은 현대중공업이 해양플랜트로 대규모 적자를 내자 회장 취임 1년 만에 경질된다.

정치인으로서 정몽준 역시 초반은 좋았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평가가 나빠진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현대중공업의 지역기반인 울산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울산 동구에서 국회의원 5선을 하게 된다.

축구계에서 쌓은 업적과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바탕으로 유력 대선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은 정치인 정몽준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는 계기가 된다.

정몽준은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와 단일화경선 TV토론에서 시종일관 공세적인 태도로 질문을 퍼부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중장년층에게 역효과를 불러왔다. TV토론을 누가 더 잘했느냐는 여론조사에서 TV토론 다음날엔 앞섰지만 이틀 후부터는 노무현 후보에게 재역전을 당했다. 결국 2002년 11월24일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해찬 당시 민주당 기획본부장은 이를 두고 “반응이 늦게 오는 중장년층을 노린 전략이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정몽준은 대선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공조를 파기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오판임이 증명됐다. 정몽준의 특별보좌관이었던 김흥국씨는 이후 “‘단 하루를 못 참았느냐’는 비난을 수도 없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정치적 재기를 위해서 한나라당에 입당하지만 유력 대선후보로서의 입지를 다시 확보하기는 어려웠다.

정몽준은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막내아들의 ‘세월호 유가족 비하 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결국 패배했다. 정몽준은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면서 국회의원직을 포기했기에 서울시장선거 패배는 정치인 정몽준의 마감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축구계 행정수반으로는 대한민국 축구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4년 FIFA 아시아담당 부회장에 당선돼 월드컵 유치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전에서 정몽준은 현대그룹의 조직력을 이용한 총력전을 펼쳤다. 일본은 대한민국보다 4년 먼저 월드컵 유치전을 시작했기에 공동개최를 이끌어낸 것은 사실상 역전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02월드컵 개최와 4강 신화 달성은 정몽준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장기간 재임하면서 대한축구협회와 현대가문의 연결고리를 크게 강화했다.

정몽준이 대한축구협회 임원으로 기용했던 남광우 사무총장과 유영철 홍보국장, 가삼현 국제국장, 김동대 사무총장보는 모두 현대계열사 출신이었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도 정몽준의 사촌이다.

그러나 축구계 행보 역시 판단미스로 후반부로 갈수록 평가가 나빠졌다.

2002년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면서 아벨란제 당시 FIFA회장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아벨란제 FIFA회장은 당시 일본을 지지하고 있었다.

아벨란제는 물러나면서 차기 주자로 블래터를 내세웠는데 정몽준은 블래터의 대항마였던 요한슨 유럽축구연맹 회장과 하야투 아프리카축구연맹 회장을 지지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블래터는 FIFA 회장으로 장기집권을 했고 이후 정몽준은 국제 축구계에서 힘을 잃었다.

2015년 FIFA 회장선거 출마로 재기를 노렸으나 이 역시 FIFA 윤리위원회로부터 6년간 자격정지를 당하면서 무산됐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5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그러나 졸업 후 2년여 간의 군복무기간과 미국 MIT 유학기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는 현대중공업 상무로 들어온 1980년 7월부터 일했다. 1982년 불과 31세의 나이에 현대중공업의 사장으로 승진했다.

1983년 대한양궁협회장, 1984년 실업테니스연맹 회장 등을 지내며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다. 특히 1981년에는 당시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이던 부친 정주영 회장의 올림픽 유치활동을 도왔다.

1985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박사과정을 밟았고 1987년 11월 귀국해 현대중공업 회장을 맡았다.

1988년 4월 제1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울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0년 민주자유당(민자당)에 입당했다가, 부친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해 ‘초원복집사건’에서 범인은닉죄를 적용받아 징역 6월,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정몽준은 선친의 대선 실패 이후 축구에서 활로를 찾았다. 1993년 1월 김우중 회장에 이어 제47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했고 2002년 월드컵 유치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1994년 5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힐튼 호텔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아축구연맹 연차총회에서 실시된 아시아지역 FIFA부회장 선거에서 일본의 무라타 타다오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월드컵 유치 경쟁에서 일본보다 늦게 시작했으나 1996년 5월 대한민국과 일본의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이끌어냈다. 같은해 12월 정몽준은 2002년 월드컵 한국 측 조직위원회 실무부위원장에 선출됐다.

한일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로 유력 대선후보로 떠오르자 2002년 9월 1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국민통합21을 창당했다.

그러나 대선후보 등록을 이틀 앞둔 11월 25일 노무현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와 단일화 여론조사 경선에서 패했다. 대통령 투표일 하루 전날인 12월 18일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 파문을 일으켰다.

2007년 제 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듬해 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2위로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2009년 박희태 당 대표가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로 대표직을 내놓자 당대표를 승계했다. 당 대표 취임 9개월 만인 2010년 6월 6·2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2009년 1월 대한축구협회 회장선거에서 5선을 포기하고 물러나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을 맡았다. 2011년 1월 아시아지역 FIFA부회장 선거에서 5선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FIFA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해 정몽준을 FIFA 명예부회장으로 추대했다.

◆ 학력

1964년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를 거쳤다.

이후 서울대학교에 경제학과에 진학해 1975년 졸업했다.

육군중위 만기 전역 후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경영대학원에서 1980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박근혜 대통령 및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장충초등학교 동창이다. MIT 대학원 동문으로는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전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위원장)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둘째 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부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1993년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문제연구원(SAIS)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외에도 2002년엔 한국체육대학교에서, 2011년엔 전주대학교와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조부 정봉식씨는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 농민 출신이다. 부친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정봉식의 장남이다.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구가 둘째 형이며, 현대백화점 그룹 명예회장 정몽근이 셋째 형,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다섯째 형이다.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정몽일 전 현대기업금융 회장 등이 동생이다.

사촌으로 정몽국 엠티인더스트리 회장,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 및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 정몽선 전 현대시멘트 회장,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 정몽훈 성우전자 회장, 정몽용 성우오트모티브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및 대한축구협회장, 정몽진 KCC회장 및 정몽익 KCC사장 등이 있다.

외무부 장관 등을 지낸 유력 정치인인 김동조씨의 4녀 김영명씨와 결혼했다. 처형인 김영숙씨의 사위가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회장이다.

또 다른 처형인 김영자씨의 남편은 GS그룹가문의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이다. 허광수 회장의 차녀인 허유정씨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장남인 방준오씨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정기선, 정예선) 2녀(정남이, 정선이)를 두었다.

장남 정기선은 동아일보와 보스턴컨설팅 그룹, 크레디트스위스그룹을 거쳐 현재 현대중공업 전무로 일하고 있다.

정남이씨는 공익재단인 아산나눔재단에서 기획팀장을 맡고 있다.

정선이씨는 2014년 8월 15일 미국 벤처기업인 백종현씨와 결혼했다. 백종현씨는 하버드대 건축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유학 중 정선이씨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정예선씨는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의미와 돌림자 ‘선'을 합쳐서 지었다고 한다.

◆ 상훈

2002년 한일월드컵 유공자 자격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정몽준은 2002 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월드컵의 성공 개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9년 세계 축구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말레이시아 다투 작위를 받았다. ‘다투’는 말레이시아 내국인 가운데 국가 발전에 공헌을 한 이에게 주어지는 작위다. 정몽준은 외국인으로서 주앙 아벨란제 전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및 조셉 블래터 현 FIFA 회장에 이어 세 번째로 작위를 받았다.

2010년 남미축구연맹(CONMEBOL)에서 최고 훈장을 받았다.

◆ 상훈

2002년 한일월드컵 유공자 자격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정몽준은 2002 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월드컵의 성공 개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9년 세계 축구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말레이시아 다투 작위를 받았다. ‘다투’는 말레이시아 내국인 가운데 국가 발전에 공헌을 한 이에게 주어지는 작위다. 정몽준은 외국인으로서 주앙 아벨란제 전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및 조셉 블래터 현 FIFA 회장에 이어 세 번째로 작위를 받았다.

2010년 남미축구연맹(CONMEBOL)에서 최고 훈장을 받았다.

어록


“이 모든 절차가 저의 FIFA 내 활동을 저지하려는 특정세력의 비윤리적인 공작에 불과하다고 지적해왔다. 무엇보다도 실망스러운 것은 FIFA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에 대한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는 것은 제 명예회복뿐 아니라 FIFA의 변화와 개혁에 일조하는 과정이다. CAS 항소를 포함한 모든 법적인 조치를 강구하겠다.” (2016/7/6, 국제축구연맹 항소결과에)

“신임 회장의 당선을 축하한다. 신임 회장이 아벨란제-블래터의 체제를 청산하고 FIFA의 근본적인 개혁을 이뤄내기를 기대한다. 신임 회장의 당선을 계기로 FIFA가 명예를 회복하고 많은 축구팬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게되기를 바란다.” (2016/2/26, 지아니 인판티노가 국제축구연명 회장에 당선되자)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서 인접 적대국이 핵무기 실험을 할 때 대충 말 폭탄이나 쏘고 그만두는 경우가 있는지 궁금하다. 핵무기는 핵무기로 대응해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역설이야말로 냉전의 교훈이다. 핵에 상응하는 강력한 수단이 있을 때만 핵을 없애는 협상도 가능하다.” (2016/1/31, 자신의 블로그에서)

“젊은시절 아버님은 거친 막노동으로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했다. 평생을 부유한 노동자로 여기며 소탈해했다.”(2015/11/23,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아산 정주영 100주년 기념 사진전에서)

“저희 아버님하고 김 전 대통령하고 개인적으로 친하셨습니다. 좋은 관계를 끝까지 계속 유지하도록 제가 잘했어야 했는데 그런 부분이 아쉽습니다.” (2015/11/22,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방문해)

“지하철 사고 원인은 서울대공원 사육사 사건과 같은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울대공원 원장을 잘못 임명하니까 곤충 사육사가 호랑이 우리에 가서 사고를 당했다”(2014/05/04, 지하철 2호선에서 추돌사고가 나자 박원순 서울시장의 책임론을 제기하며)

“내가 서울시장 후보가 되면 국회의원직을 사퇴해야 하는데 지역구(서울 동작구)를 부인에게 공천하도록 하겠다.” (2014/5/11,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측근 및 캠프 인사 10여 명과 점심을 함께하면서)

“제 아내를 만나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앞에서 사과하고 뒤에서 딴말하는 이중얼굴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2014/5/11, 아들 정예선의 발언에 대한 부인 김영명의 발언이 다시 파문을 낳자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과문에서)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사죄드립니다. 제 막내아들의 철없는 짓에 아버지로서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저희 아이도 반성하고 근신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이번 일로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2014/4/21, 아들 정예선의 세월호 관련 발언 논란이 격해지자 국회 정론관에서 발표한 사과문)

“핵주먹 타이슨이 권투경기 중 상대편 귀를 물어뜯어 쫓겨났다.” (2014/4/1,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앞두고 김황식 전 총리 캠프의 네거티브 공세를 비판하며)

“탈모되는 분들에게 필요한 건 발모제예요. 그런데 발모제는 꼭 머리가 없는 사람들만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 그건 옳은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14/3/5, MBN '뉴스공감'에 출연해 "재벌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서민정책을 펼칠 수 없을 것"이라는 시각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김성환) 장관 같은 사람이 장관을 하니까 외교부가 문제없이 잘되는지….” “거친 표현으로 결례를 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2011/9/19,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여당(한나라당) 소속이었음에도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반말조로 언쟁을 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며)

“북한의 핵무장은 우리의 생존이 달린 문제다. 핵무기를 갖고 있는 북한과 평화 공존할 수 없으며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가능한 모든 대안을 고려해야 한다.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에 대해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1991년 철수한 미국 전술핵무기를 다시 반입할 필요가 있다. 전술핵 재반입은 북핵 폐기를 위한 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전술핵 재반입은 NPT 체제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제적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2013/3/18, 북핵 문제 취재를 위해 방한한 안나 코렌 홍콩 주재 CNN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요즘은 카드로 타는데 한 번 탈 때 70원 하나요?” (2008/6/27, KBS1 라디오 한나라당 당권주자 생방송 토론에서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이 "서민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 기본요금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라고 묻자)

“관중들은 축구협회 직원이 아니고, 자기 돈 내고 들어온 사람들한테 태극기를 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2002년 9월 남북축구경기에서 박근혜가 “관중들이 한반도기를 들기로 했는데 왜 태극기를 들었느냐”, 또 경기 전 붉은 악마가 ‘대한민국’을 외치자 “왜 ‘통일조국’을 외치기로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며 항의하자 - 자신의 자서전 '나의 도전 나의 열정' 에서)

“나도 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 뭐 딴 데서 나나. 어느 시점에서 생모가 누구인지 밝히겠다” (2002/8/16, 기자들과 산행을 하며 출생의 비밀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변중석 여사가 친모가 아니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며)

“그런 식으로 일하려면 모두 집에 가.” (1984년 울산 현대중공업 작업장에서 근무시간에 낮잠을 즐기는 직원을 훈계하는 가운데 일렬로 세워놓고 ‘군기가 빠졌다’고 호통을 치며)

◆ 평가

정몽준의 인생은 크게 현대중공업의 오너와 정치인, 축구인으로 평가받는다. 세 영역에서 모두 성공한 지위를 누렸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판단착오로 실패가 반복되면서 평가가 나빠졌다.

현대중공업에서 직접 경영에 나선 기간은 채 몇년이 되지 않는다. 현대중공업은 정몽준이 회사경영보다는 정치계와 축구계 활동에 집중하면서 소유와 경영인 분리된 전문경영인 체제를 일찍부터 구축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사장은 정몽준의 경영능력에 대해 “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으로 조선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불황에 허덕일 때 당시 정 사장은 시추선에 진출하는 등 조선 선종을 다양화하고 로봇 철탑 건설장비까지 업무영역을 넓혀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현대중공업은 전문경영인 체제 하에서 고속성장을 지속한다. 1990년대 후반 현대중공업의 매출은 6조 수준이었으나 2011년 50조 원을 돌파했다.

정몽준은 2013년 50년 지기였던 이재성 현대중공업 사장을 회장으로 올려 현대중공업의 경영권을 맡긴다. 그러나 이재성 회장은 현대중공업이 해양플랜트로 대규모 적자를 내자 회장 취임 1년 만에 경질된다.

정치인으로서 정몽준 역시 초반은 좋았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평가가 나빠진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현대중공업의 지역기반인 울산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울산 동구에서 국회의원 5선을 하게 된다.

축구계에서 쌓은 업적과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바탕으로 유력 대선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은 정치인 정몽준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는 계기가 된다.

정몽준은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와 단일화경선 TV토론에서 시종일관 공세적인 태도로 질문을 퍼부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중장년층에게 역효과를 불러왔다. TV토론을 누가 더 잘했느냐는 여론조사에서 TV토론 다음날엔 앞섰지만 이틀 후부터는 노무현 후보에게 재역전을 당했다. 결국 2002년 11월24일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해찬 당시 민주당 기획본부장은 이를 두고 “반응이 늦게 오는 중장년층을 노린 전략이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정몽준은 대선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공조를 파기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오판임이 증명됐다. 정몽준의 특별보좌관이었던 김흥국씨는 이후 “‘단 하루를 못 참았느냐’는 비난을 수도 없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정치적 재기를 위해서 한나라당에 입당하지만 유력 대선후보로서의 입지를 다시 확보하기는 어려웠다.

정몽준은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막내아들의 ‘세월호 유가족 비하 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결국 패배했다. 정몽준은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면서 국회의원직을 포기했기에 서울시장선거 패배는 정치인 정몽준의 마감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축구계 행정수반으로는 대한민국 축구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4년 FIFA 아시아담당 부회장에 당선돼 월드컵 유치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전에서 정몽준은 현대그룹의 조직력을 이용한 총력전을 펼쳤다. 일본은 대한민국보다 4년 먼저 월드컵 유치전을 시작했기에 공동개최를 이끌어낸 것은 사실상 역전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02월드컵 개최와 4강 신화 달성은 정몽준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장기간 재임하면서 대한축구협회와 현대가문의 연결고리를 크게 강화했다.

정몽준이 대한축구협회 임원으로 기용했던 남광우 사무총장과 유영철 홍보국장, 가삼현 국제국장, 김동대 사무총장보는 모두 현대계열사 출신이었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도 정몽준의 사촌이다.

그러나 축구계 행보 역시 판단미스로 후반부로 갈수록 평가가 나빠졌다.

2002년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면서 아벨란제 당시 FIFA회장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아벨란제 FIFA회장은 당시 일본을 지지하고 있었다.

아벨란제는 물러나면서 차기 주자로 블래터를 내세웠는데 정몽준은 블래터의 대항마였던 요한슨 유럽축구연맹 회장과 하야투 아프리카축구연맹 회장을 지지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블래터는 FIFA 회장으로 장기집권을 했고 이후 정몽준은 국제 축구계에서 힘을 잃었다.

2015년 FIFA 회장선거 출마로 재기를 노렸으나 이 역시 FIFA 윤리위원회로부터 6년간 자격정지를 당하면서 무산됐다.

◆ 기타

정 의원의 학생시절 별명은 ‘꺼벙이’다. 182cm의 큰 키에 정주영 명예회장의 아들로서 젊은 시절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대에 진학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기쁜 나머지 울산으로 변형윤, 이현재 교수 등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들을 초청해 크게 한턱을 냈다. 정 명예회장은 “우리 몽준이가 혹시 사무착오로 합격한 것 아니냐”고 농담하면서 잘 지도해 달라고 수차례 부탁했다고 한다.

정치인과 재벌의 병역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정몽준 자신은 1975년 학군(ROTC) 13기 소위로 임관해 1977년 중위 만기 전역했다. 장남 정기선 역시 학군 43기로 병역의무를 이행했다.

‘애처가’로 유명하다. 정몽준은 1978년 미국 MIT대 유학 중 넷째 형수 이행자의 소개로 김영명씨를 만나 1년여 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부인 자랑이 유별나서 ‘김영명이 없으면 오늘의 정몽준도 없다’는 우스갯말이 떠돌 정도다. 스스로도 살면서 가장 잘 한 일로 결혼을 꼽았다.

1988년 제13대 총선부터 2004년 17대 총선까지 울산 동구에서 당선됐다. 무소속이거나 혹은 부친이, 또 본인 스스로 창당한 정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2008년 제 18대 총선부터 서울 동작구 을에서 새누리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힘들 때 의논 상대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다. 이홍구는 정주영 일가와 오랜 친분을 맺고 있으며 정주영 명예회장 10주기 추모위원장, 아산정책연구원의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포브스가 선정한 ‘2016년 세계 억만장자’ 리스트에서 빠졌다.

2011~2013년 현대중공업에서 656억 원의 배당을 받았지만 2014~2015년에는 배당도 받지 않았다.

2009년 1월 말 국내 정치인 중 최초로 오바마 대통령을 직접 만나 취임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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