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정부가 미국 IBM과 협력해 2나노 미세공정 반도체 개발과 생산 계획을 공식화했다. IBM의 2나노 반도체 웨이퍼 이미지. |
[비즈니스포스트]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불붙은 글로벌 반도체 경쟁은 한국과 대만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각국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와 TSMC가 미국과 중국을 모두 중요한 사업 기반으로 두고 있어 두 국가의 충돌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웃 국가인 일본도 미국과 중국을 모두 중요한 외교적 상대이자 무역 파트너로 여기고 있는 만큼 반도체 시장에 나타나는 변화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정부가 일본에도 중국 반도체 규제 동참을 요구하며 적극적 대응이 불가피해졌다.
일본 정부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계기로 첨단 반도체 개발과 생산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실감했다. 한국과 대만에 이어 미국과 중국이 치열한 대결을 통해 자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면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은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
특히 시스템반도체 미세공정 기술을 내재화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다양한 방법을 검토하게 됐다. 이후 미국 정부와 협력 등 다양한 방식을 검토한 결과 IBM과 ‘동맹군’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IBM은 첨단 반도체 파운드리에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직접 반도체 제조업을 영위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이 주축으로 설립한 반도체 회사가 IBM과 협력하면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라피더스 설립을 주도했다.
라피더스는 일본 정부와 소니, 키오시아, 소프트뱅크와 토요타 등 현지 기업이 공동으로 출자해 신설한 법인이다. 회사의 설립 목표는 분명하다. 2030년 이전까지 2나노 미세공정 반도체 기술과 생산설비를 모두 확보해 첨단 파운드리시장에 뛰어드는 것이다.
2나노 반도체는 인텔이 2024년, 삼성전자와 TSMC가 2025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을 계획하고 있는 차세대 공정이다. 현재 일본의 미세공정 반도체 기술 수준이 40나노 안팎에 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공격적 목표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라피더스와 손잡은 IBM은 이미 2021년부터 2나노 반도체와 관련한 EUV 공정 등 원천기술을 대부분 확보하고 있어 일본의 목표 달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라피더스는 2나노 반도체 상용화를 위해 연구개발 및 생산 투자에 5조 엔(약 48조 원)을 들이겠다는 중장기 계획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미 홋카이도(북해도)를 반도체 공장 부지로 결정해 설비 투자에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IBM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2나노 반도체 시제품 이미지. |
삼성전자와 TSMC, 인텔 등 파운드리 주요 경쟁사와 달리 라피더스는 2나노 반도체 양산을 시작하기 전까지 자체 사업을 벌이지 않는다. 따라서 대규모 투자 자금은 결국 일본 정부 차원의 지원을 비롯한 외부 투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이미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산업에 3조 엔의 정부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이를 통해 일본의 경제 발전 동력을 확보한다는 야심을 앞세웠다.
미세공정 반도체를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일은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 궁극적 과제로 자리잡고 있다. 이는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군사기술 등 여러 분야에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이 인텔 등 해외 기업의 반도체 생산공장 건설을 유치해 이를 달성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과 달리 자체적으로 기술을 확보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도전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례로 꼽힌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주도적으로 첨단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앞세운 것은 결국 삼성전자와 TSMC를 겨냥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을 대상으로 한 미국 정부의 규제가 일본의 반도체 자급체제 구축을 자극하며 삼성전자에 새로운 경쟁자를 불러낸 셈이다.
특히 일본은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사태에서 볼 수 있듯 한국 반도체 산업을 압박하겠다는 의지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자연히 삼성전자를 뛰어넘는 일은 일본 정부의 라피더스를 통한 첨단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 진출에 중요한 목표일 공산이 크다.
삼성전자는 장기적으로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에서 대만과 미국, 중국과 일본 경쟁사를 모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있다.
이러한 시장 변화는 중국 정부의 공격적 반도체산업 육성 정책이 불러온 ‘나비효과’에 해당한다.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SMIC와 같은 자국 파운드리업체의 성장을 돕는 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자 각국 정부가 앞다퉈 반도체 미세공정 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사업에서 차별화된 기술력을 확보하고 반도체 투자를 효율적으로 집행해 여러 경쟁사에 맞서야 하는 과제도 자연히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
다만 지금의 글로벌 반도체 시장 상황은 단순히 기업들 사이 경쟁을 넘어 국가 간 대결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가 독자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하기는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이 반도체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산업 정책이나 외교적 측면에서 대표주자인 삼성전자를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꾸준히 고심하고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미국과 중국, 대만과 일본 정부가 모두 자국 기업을 밀어주기 위한 반도체 산업 정책에 힘을 싣는 만큼 한국 정부와 의회의 ‘역할론’도 이전보다 더 부각되고 있다. 김용원 기자
[편집자주] 2023년, 글로벌 경기침체 리스크가 현실로 다가오며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 및 국가 경쟁력에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 때다. 한국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가 현재 전 세계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파악하는 일은 이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글로벌경제팀에서 연재하는 [삼성의 라이벌] 기획은 삼성전자와 주요 라이벌 기업 사이의 경쟁 판도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예측해 삼성의 현 위치를 짚어보고 이러한 경쟁이 어떠한 방식으로 삼성의 위기 극복 능력을 키우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 진단한다.
4부 - 삼성 vs CHINA
(4) 미국 중국의 반도체 파운드리 정조준, TSMC 추격 어려워
(5) 미중 갈등에 일본도 대응 나서, 삼성 ‘2나노 반도체’ 겨냥
(6) 중국 스마트폰 '턴어라운드' 노리는 삼성, 폴더블로 재도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