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서 사업주 처벌대상이 되는 직업병의 범위를 정하는 일이 정부 몫으로 남았다.

직업병이 발생하는 대표적 업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이 국가 기간산업이고 재계와 노동계의 이해관계도 치열하게 대립하는 만큼 결론이 나기까지 진통이 예상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처벌대상에 반도체 디스플레이 직업병도 포함되나

▲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현장. <삼성전자>


13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서 말하는 직업병 종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과 같은 기존 법령에서 정하는 것을 준용하지 않고 따로 대통령령으로 정해진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2조 2항은 “동일한 유해요인으로 급성중독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에 3명 이상 발생”하는 경우를 사업주 처벌대상인 중대산업재해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노동부는 이 직업병의 범위에 관해 아직 검토하는 단계에 있다. 다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시행시기가 1년밖에 남지 않은 만큼 산업현장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이른 시일 안에 구체적 방안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시선이 쏠리는 부분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분야에서 여러 차례 보고된 직업병들의 포함 여부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제조 과정에 많은 유해물질이 사용돼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는 업종으로 꼽힌다.

실제로 과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등 관련 기업들에서 일한 노동자들은 유해물질에 지속해서 노출돼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한 소송을 내기도 했다. 

병의 종류는 백혈병, 불임, 림프종, 폐암, 다발성경화증, 시신경척수염, 뇌종양 등으로 다양했다.

이런 병들을 최근 직업병으로 인정하는 판결이 늘고 있다. 지난해 9월 서울행정법원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과 LG디스플레이 액정 디스플레이(LCD)공장에서 일하다 폐암에 걸려 숨진 협력사 노동자 A씨의 폐암을 산업재해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노동계에서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사업주 처벌 항목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 직업병이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온다.

인권단체 반올림의 이상수 상임활동가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직업병은 대표적 사례인 만큼 당연히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서 사업주를 처벌하는 직업병에 포함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종 의결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처벌 수위가 애초 원안보다 약해졌다는 점을 놓고 보면 법에 따라 사업주가 처벌되는 직업병의 범위 역시 노동계에서 바라는 것보다 좁아질 가능성이 나온다.

정의당 강은미 의원 등이 제시한 원안에 따르면 중대산업재해에 책임이 있는 기업의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은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때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천만 원 이상 1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받도록 돼 있다. 

그러나 최종 의결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같은 사례에 관해 1년 이상의 징역, 1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명시했다. 징역기간이 줄고 벌금 하한선이 없어진 것이다. 다만 징역과 벌금을 함께 부과할 수 있게 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전자산업은 국가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따라 사업주가 처벌받아 기업 경영에 차질이 빚어지면 파급효과가 클 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2020년 한국 전체 수출규모 5423억3천만 달러에서 반도체와 평판디스플레이·센서 품목은 21.1%를 차지했다. 

관련 분야의 투자위축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6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초래할 수 있는 5가지 문제점' 보고서를 발표해 기업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우려해 국내 생산공장을 해외로 옮기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노동계에서는 오히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산업인 만큼 노동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직업병이 발생하는 사업장을 적극적으로 단속해야 한다고 본다.

직업병은 쉽게 발견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법적으로 처벌 규정을 세움으로써 기업들이 애초 직업병이 발생하지 않은 작업 환경을 만들게끔 엄격하게 관리할 동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상수 상임활동가는 “직업병은 회사에서 퇴직한 뒤, 해당 업무에서 일하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 발견되는 사례가 많다”며 “직업병을 처벌하는 법률뿐 아니라 현장에서 직업병을 줄일 수 있는 보건조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