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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산업
[Who Is ?]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대한해협 누빈 1세대 기업인
서하나 기자 hana@businesspost.co.kr | 입력 : 2017-09-29 08:42:02
▲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 생애

신격호는 롯데그룹 명예회장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등과 함께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이다. 4대 그룹 창업 1세대 총수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다.

1922년 10월4일 경상남도 울산군 상남면 둔기리에서 태어났다. 

부산공립직업학교를 마친 뒤 아내와 딸을 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유학을 떠날 때부터 일본에서 돈을 벌 계획을 세웠다. 껌사업을 시작으로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했으며 롯데상사, 롯데부동산, 롯데아도, 롯데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유통업으로 일본의 10대 재벌이 됐다.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하고 차츰 중공업과 건설 쪽으로도 진출해 한국의 5대 재벌로 몸집을 키웠다. 일본롯데 회장을 지냈고 한국 롯데그룹 총괄회장을 거쳤다. 

롯데제과 등기이사와 롯데호텔 대표이사를 시작으로 롯데그룹 임원에서 단계적으로 퇴진해 롯데알미늄을 마지막으로 모든 임원에서 물러난 뒤 롯데그룹 명예회장으로 남아았다.

일본 롯데홀딩스 경영권을 두고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형제의 다툼이 격화하고 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의 횡령배임 관련 재판이 이어지는 등 내부비리와 박근혜 게이트로 한일 양쪽 롯데에 바람 잘 날이 없었고 이 과정에서 심신이 약해졌다.  

정신적 제약으로 판단력 등이 부족한 상태라고 판단돼 한정후견 대상으로 결정됐으며 치매 판정도 받았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본관, 별관, 롯데월드타워 등을 후보로 두고 거주지변경 절차를 밟고 있다.

◆ 경영활동의 공과
 
△건강과 거처
신격호는 잠실 롯데월드타워와 소공동 롯데호텔 본관 가운데 거처를 결정해야 한다.

신격호는 수십년 동안 서울시 소공동 롯데호텔 신관 34층에 머물러왔는데 호텔이 개보수 작업을 진행하면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신격호의 둘째 아들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신격호가 롯데월드타워에 머물러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는 반면 신격호의 첫째 아들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롯데호텔에 머무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신동빈 회장은 고령에다 치매를 앓고 있는 신격호가 롯데월드타워에 머무를 수 있도록 설계까지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격호는 2016년 4월에 치매판정을 받은 상태로 2017년 6월부터 한정후견인으로 사단법인 선을 두고 있다.  
▲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2017년 5월3일 오후 잠실 롯데월드타워를 방문해 임직원들과 함께 주변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경영권 분쟁
신격호의 두 아들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2015년부터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경영권 분쟁의 시작은 첫째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2015년 1월 롯데홀딩스 부회장에서 전격 해임된 뒤 신동빈 회장을 롯데홀딩스 이사에서 해임하는 데 실패하면서다.

신 전 부회장은 한국에 와서 일본 롯데홀딩스 사장에 재임명한다는 신격호의 지시서 내용을 공개했다. 또 신격호가 ‘신동빈을 지지하지 않고 한국 롯데그룹 회장과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로 임명한 적이 없다’라는 내용의 영상도 공개했다.

신 회장도 이에 맞서 한국에서 대국민 사과문 형식의 입장을 발표했다. 또 호텔롯데의 일본 지분율 축소, 롯데그룹에 얽힌 순환출자 80%를 해소, 지주회사 전환을 약속했다.

신 회장은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상정안건들을 기존의 원안대로 통과시키고 호텔롯데 비공개 임시주주총회 열어 신 전 부회장을 호텔롯데 등기이사에서 해임했다. 이에 따라 신 전 부회장은 한국 롯데그룹 계열사의 모든 등기이사에서 물러나게 됐다.

2015년 10월 신동주 전 부회장도 반격에 나섰다. 광윤사 주주총회를 열어 신동빈 회장을 광윤사 이사에서 해임시켰다. 2016년 2월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 소집 요구 기자회견을 열어 이사 전원의 해임을 요청했다.

신 전 부회장은 “후계자는 장남”이라고 한 신격호의 영상 인터뷰를 공개했다. 그는 롯데홀딩스 주총에서 승리하기 위해 핵심 키를 잡고 있는 종업원지주회에 '1인당 25억 원'이라는 거액을 약속하면서 지분해체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 3월 롯데홀딩스 임시주주총회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이 제안한 의안은 모두 부결됐다. 이후 2015년 8월, 2016년 3월과 6월, 2017년 6월 등 주주총회에서 신 전 부회장의 경영권복귀가 수포로 돌아가며 거의 신동빈 회장의 독주체제로 자리를 잡게 됐다.

이 과정에서 신격호의 판단력이 극심하게 저하된 상태라는 ‘건강이상설’이 꾸준히 흘러나왔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신격호의 판단능력에 이상이 없음을 강조해 왔다.

신 전 부회장은 2017년 9월 롯데쇼핑 지분 3%만 남기고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롯데푸드의 지분을 모두 매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영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롯데월드타워 건립
신격호는 서울 잠실에 롯데월드타워(제2롯데월드)를 완공하는 것을 숙원사업으로 삼았는데 롯데월드타워는 2016년 말 완공돼 2017년 4월3일 개장했다.

롯데월드타워는 1987년 “잠실에 세계적인 초고층 빌딩을 짓겠다”며 입지를 선정하면서부터 신격호의 숙원사업이자 꿈으로 불렸다. 

신격호는 롯데월드타워 개장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신동빈 회장이 신격호에게 ‘언제, 어느 때라도 좋으니 롯데월드타워를 꼭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회신하지 않았다. 

신 회장은 개장식에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랜 시간 동안 롯데월드타워의 탄생을 위해 열정을 쏟으신 신격호 회장에게 고개숙여 경의를 표한다”고 강조했다.
 
신격호는 롯데월드타워를 개장한 지 한달이 지난 2017년 5월3일에야 롯데월드타워를 찾아 꼭대기층에 올랐다.

△한국 롯데그룹의 성장
신격호는 껌 장사로 시작한 롯데그룹을 국내에서 삼성, 현대자동차, SK, LG에 이어 재계 5위 안에 드는 대기업으로 키웠다.

신격호는 1967년부터 1980년까지 롯데그룹의 식품역량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았다. 롯데제과를 설립한 뒤 롯데칠성음료, 롯데삼강, 롯데리아 등을 잇달아 출범하며 국내 최대의 식품회사로 자리잡아갔다. 

신격호는 이 기간에 국가 기간산업에도 진출했다. 호텔롯데, 롯데건설, 호남석유화학, 롯데전자, 롯데상사 등을 중심으로 국내 유통, 관광산업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1981년부터 1996년까지에 해당되는 도약기에 한국 10대 기업에 진입했다. 1980년에 롯데월드, 호텔롯데부산, 롯데물산 등을 세우고 한국후지필름을 설립해 첨단산업까지 영위하게 됐다. 롯데자이언츠, 대홍기획 등도 이 시기에 설립돼 롯데그룹의 '문화'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97년에는 국내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쳐왔으나 신격호는 업계우위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롯데호텔의 국내 사업망을 완성하고 식음료산업과 유통관광산업에 더욱 힘을 쏟았다.

롯데그룹은 특히 1997년부터 2008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성장해 글로벌 기업으로서 위상을 갖추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기에 롯데그룹은 동남아와 중국, 미국 등으로 영토를 넓히는 데 속도를 냈다. 2006년 롯데쇼핑이 한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상장하기도 했다.

2004년은 경영권의 무게중심이 신격호에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한 해로 평가된다.

신 회장은 2004년 10월 롯데 정책본부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인수합병을 통해 롯데그룹의 덩치를 키웠다. 특히 롯데그룹의 주력사업 가운데 하나인 롯데케미칼이 말레이시아 타이탄케미칼을 인수한 것은 대표적인 인수합병 성공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유통사업에서도 하이마트와  KT렌탈을 인수하고 중국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무리한 해외진출과 인수합병이 결국 롯데그룹의 발목을 잡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롯데그룹은 2017년 초부터 중국에서 사드보복 조치 등으로 어려움이 커지자 2017년 9월 결국 롯데마트의 매각을 결정했다. 

△한국 롯데 설립
신격호는 1966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롯데알미늄, 1967년 롯데제과를 잇달아 세웠다.

이후 사업분야를 넓혀 1973년 호텔롯데·롯데전자·롯데기공, 1974년 롯데산업·롯데상사·롯데칠성음료 등을 설립했다. 이어 1975년 롯데자이언츠, 1978년 롯데삼강, 롯데건설, 롯데햄, 롯데우유, 1979년 롯데쇼핑, 1980년 한국후지필름, 1982년 롯데캐논·대홍기획 등을 출범했다. 또 1978년에는 롯데크리스탈호텔을 건설했다.

한국와 일본을 오가며 그룹을 경영해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홀수달에는 한국, 짝수달에는 일본에 머물렀다.

국내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동탑산업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일본 롯데 설립
신격호는 일본에 발을 딛은 지 8년 만인 1948년에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롯데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를 담아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속 여주인공 ‘샤롯데’의 애칭인 ‘롯데’에서 따왔다.

이후 신격호의 사업이 번창하면서 1959년 롯데상사, 1961년 롯데부동산, 1967년 롯데아도, 1968년 롯데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상업, 유통업으로 커졌다. 금새 일본의 10대 재벌로 떠올랐다.

신격호는 유통업뿐 아니라 롯데전자(1971), 롯데리아(1972), 롯데리스(1978), 롯데데이터센터(1985), 롯데엔지니어링(1987) 등을 설립하며 사업 영역을 넓혔다.

1972년 롯데 오리온스를 인수해 3대 구단주에 취임하기도 했다. 1992년 신동빈 회장이 지바롯데마린스라고 구단이름을 바꿨다.

△껌으로 사업 시작
신격호는 1944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에서 껌 장사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껌사업이 성공해 롯데그룹의 모태가 됐다.

신격호는 과자와 청량음료 등을 비롯해 합성수지 등 거창한 사업계획을 세웠으나 한동안 풍선껌만 만들었다. 사업을 시작한 당시 세계대전 직후였던 만큼 주전부리에 불과한 ‘껌사업’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신격호의 껌사업은 일본에서 풍선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성공을 거뒀다. 
▲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2017년 3월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롯데그룹의 경영비리 관련 1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비전과 과제

신격호는 앞으로 머물 곳을 정해야 한다.

신동주 신동빈 형제가 각기 다른 장소를 제시했는데 법원은 직접 판사들을 통해 신격호가 머무를 장소 실사에 나서 신격호에게 직접 거주지 변경의사를 묻기로 했다.

건강유지와 치매진행 완화에도 힘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 평가

자수성가로 성취를 이룬 대표적 기업인이다. 맨손으로 시작해 한국과 일본에서 롯데그룹을 세웠다. 신철호 전 롯데 사장,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등 형제와 갈등에도 흔들림없이 그룹을 키웠다.

안전지향적이나 추진력이 강하다.

1등을 하지 못할 업에 손을 대지 않으며 '짠물경영', '현찰경영'으로도 유명하다. 본인이 모르는 사업은 뛰어들지 않는다.

시의적절한 상품의 개발과 수요를 기민하게 읽는 파악력,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이 성공의 비결로 꼽힌다.

그룹 후계구도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지 않고 직관과 실적에 기반한 경쟁방식을 유지하다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을 초래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체계가 부실하고 공개적이지 못한 경영방식은 종종 비판을 받았다.

롯데그룹의 불투명한 지배구조도 전근대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롯데그룹의 지배구조 정점에 일본 광윤사와 일본 롯데홀딩스, L투자회사가 있는데 이들 회사는 비상장사라 지분구조와 주주가 철저히 베일에 가려있다.

신격호가 2015년 7월 일본 도쿄 롯데홀딩스 본사에서 손가락으로 신동빈 회장 등을 가리키며 해임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이는 상법을 무시하는 절차였다.

롯데제과에 애정이 깊다. 늘 책상 위에 롯데 껌을 올려 두었다. 2015년 8월 신격호의 집무실이 언론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을 때 그의 책상에 ‘롯데 그린껌’이 놓여 있었다.

1971년 만든 ‘둔기회’를 이끌어 왔다. 1969년 울산공단에 공업용수를 대기 위해 댐이 건설되자 영산 신씨 집성촌이었던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일부가 수몰됐다.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신격호는 이를 안타까워해 둔기회를 조직했다. 이 모임은 매년 5월 첫째 주말에 마을잔치를 열고 있으며 현재 1100여 세대로 늘어났다.

신격호가 살았던 마을 근처에 별장이 있다. 신격호는 매년 한두 차례 이곳에 와서 쉬며 선친묘소를 찾는다.

신격호의 일본이름은 시게미쓰 다케오다.
▲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
◆ 사건 사고

△아버지 신진수씨 유골 도난사건
신격호는 1999년 3월5일 울산군에 있던 아버지 신진수씨의 묘소 유골이 절도범에게 도난당했다.

범인들은 “유골을 돌려줄테니 트렁크에 8억 원을 넣어 부산에서 돈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7일 정금용, 임종순씨 등 2명이 모두 검거됐다. 

경찰에 붙잡힌 임종순씨는 "롯데와는 관련이 없고 원한도 없다.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일을 저질렀다"라고 진술했다.

△형제간 다툼
1966년 12월 16일 동생 신철호 전 롯데 사장이 롯데화학공사를 설립하기 위해 회사공금 4억2천여 만 원을 가로챈 사실이 밝혀져 검찰에 의해 고소됐다. 신 전 사장은 형 신격호와 동생 신춘호 농심 회장의 도장을 위조해 공금을 횡령했다.

1973년 신춘호 회장과 법정소송을 벌였고 1996년 막내 동생인 신준호씨와 땅 문제로 법정소송을 벌였다.
 
◆ 경력

1949년 일본에서 롯데를 설립했다.

1959년 롯데상사, 1961년 롯데부동산, 1967년 롯데아도, 1968년 롯데물산, 주식회사 훼밀리를 세웠다.

1969년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도쿄 오리온즈 구단을 보유한 다이에이 영화사 사장 나가타 마사이치 구단주의 요청을 받아 팀이름을 롯데오리온스로 바꿨다. 

1972년 롯데오리온스를 인수한 뒤 1992년부터 팀명을 지바롯데마린스로 바꿨다.

1966년 한국에 진출해 롯데알미늄을, 1967년 롯데제과를 출범했다.

1972년 롯데리아, 1973년 롯데호텔, 롯데기공, 롯데전자, 1974년 롯데칠성음료, 1975년 롯데 자이언츠, 1976년 호남석유화학, 1978년 롯데삼강, 롯데건설, 롯데햄, 롯데우유, 롯데서비스, 1979년 롯데쇼핑 등을 잇달아 세웠다.

1980년 한국후지필름, 대홍기획을 설립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롯데 자이언츠를 프로야구단으로 바꾸고 초대 구단주를 지냈다.

1985년 롯데데이터센터, 1987년 롯데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2011년 2월 둘째 아들인 신동빈 회장에게 한국 롯데그룹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총괄회장을 맡았다.

2015년 7월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에서 물러났다.

2016년 3월 롯데제과의 등기이사에서 49년 만에 물러났다. 후임으로 황각규 롯데그룹 정책본부 운영실장이 선임됐다. 롯데그룹은 고령과 성년후견인(대리인) 가능성 등을 고려한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2016년 부산롯데호텔 사내이사에서 물러났다.

2017년 롯데자이언츠, 롯데쇼핑, 롯데건설 이사에서 퇴임했다. 6월 한일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를 내려놨다.

2017년 8월 마지막 등기임원 직위를 유지하던 롯데알미늄에서 물러나면서 모든 롯데그룹 임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9월 현재 신격호는 명예회장 지위만 유지하고 있다.

◆ 학력

1933년 삼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마쳤다.

1940년 부산공립직업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 2012년 열린 둔기리 마을잔치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 가족관계

아버지 신진수씨와 어머니 김필순씨의 5남5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진수씨는 상당한 재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남동생이 넷 있다. 신철호 전 롯데 사장, 신춘호 농심 회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 신선호 일본 산사스사장 등이다. 여동생 신정희씨는 동화면세점 사장이며 매제 김기병은 롯데관광 회장이다.

직업학교를 졸업한 뒤 ‘명천국립종양장’의 연수생으로 1년 동안 일했다. 이 기간 이웃 마을 부농의 딸인 노순화씨와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인 노씨는 신격호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사망했다. 노씨와 사이에서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을 낳았다.

신격호는 일본에서 다케모리 하츠코와 결혼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뒀는데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이다. 다케모리 하츠코는 남편의 성을 따라 시게미쓰 하츠코로 이름이 바뀌었다.

2016년 3월 신격호의 성년후견인 지정 신청 재판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의 변호인 김수창 변호사는 시게미쓰 하츠코가 신격호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라고 말했다.

신격호의 세 번째 부인 서미경씨도 사실혼 관계다. ‘롯데의 별당마님’으로 불리는 서씨는 제1회 미스롯데(1977) 출신으로 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돌연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37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신격호의 세 번째 부인으로 등장해 세간을 놀래켰다.   

서씨는 백화점과 영화관 매점 사업권 등 알짜 사업을 소유하며 그룹 내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딸을 신격호의 호적에도 올렸는데 그가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이다.

◆ 상훈

1978년 5월17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81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95년 9월27일 제22회 관광 진흥 촉진대회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97년 12월 10일 일본 와세다대 한국동창회 공로패를 받았다.

1998년 조선일보에서 꼽은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에 선정됐다.

◆ 기타

한국과 일본에 보유한 막대한 부동산을 바탕으로 부를 쌓았다. 2006년 포브스 발표에 따르면 신격호 회장 일가의 재산은 약 45억 달러로 세계 136위이다.

◆ 어록

“법적으로 주식을 받은 사람이 증여세를 내는 것이지 준 사람이 내는 게 아니다”며 “직원들에게 절세를 지시했지 탈세를 지시한 적이 없다” “만약 탈세한 부분이 있었다면 납부하겠다.” (2016/09/08, 서울중앙지검 롯데수사팀의 조세포탈과 배임 등 혐의조사를 받던 중)

“서울에 세계 최고 높이의 제2롯데월드를 짓는 것이 여생의 꿈이다.” (2016/6/21,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서)

“과감한 혁신과 현장중심경영으로 기존사업의 내실화에 만전을 기해 달라.” (2014/01, 신년사에서)

“망하더라도 제일 늦게 망해야 한다.” (1998/06/18,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나에겐 늘 극복해야 할 일들이 있다. 돈을 버는 것만이 내가 추구하는 전부가 아니고 극복할 일들이 있다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낀다.” (1983/10,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큰 일을 하려면 작은 일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껌은 23개 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 1만5천 종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그 1만5천가지 제품의 특성과 생산자, 그리고 소비자 가격을 알고 있다” (1983/10,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기자가 껌 한 통의 소비자 가격을 알고 있는 회장에 놀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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