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은 국무총리 후보자다. 산업계와 정부, 국회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았으며 균형감각과 대인능력으로 정치인으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정세균은 1950년 9월26일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쌍용그룹에서 상무로 재직했다. 쌍용그룹에서 미국 주재원으로 일하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의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돼 정계에 입문했다. 그 뒤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의장,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민주당 대표 등을 지냈고 참여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도 역임했다. 6선 의원이자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재직했다. ◆ 가족관계 1978년 부인 최혜경씨와 결혼했다. 아들 준원씨와 딸 유선씨를 두고 있다. ◆ 학력 1963년 능길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정규중학교가 아닌 주천고등공민학교를 다니다 1966년 검정고시로 중학 졸업 학력을 취득했다. 1969년 전주 신흥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4년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뉴욕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페퍼다인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받았다. 2000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땄다. 2014년 8월22일 전북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경력 대학시절 학교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학생운동에 몸담았다. 1973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1978년에 쌍용그룹에 입사했다.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등 종합상사 해외주재원으로 지내면서 시멘트, 기계부품, 신발 등 국제 영업 최전선에서 근무했다. 1995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정계 입문 제안을 받고 특별보좌관으로 정치계에 발을 들였다. 1995년 민주당 진안무주장수지구당 위원장에 올랐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전북 무주진안장수 지역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15대 국회 상반기에 새정치국민회의 원내부총무를 지냈고 하반기에 원내수석부총무에 올랐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15대와 16회 국회에서 재정경제위원회 간사를 지내고 건설교통위원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등을 거쳤다. 2004년과 제17대 총선과 2008년 제18대 총선도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돼 전북에서만 내리 4선을 했다. 17대 국회에서 정보위원회를 거쳐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5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에 올랐고 10월 임시당의장에 선출됐다. 2006년 2월 제9대 산업자원부 장관에 임명됐다. 2007년 1월 11개월만에 당으로 복귀해 2월 전당대회에서 당의장에 합의추대됐다. 8월 대통합민주신당이 출범한 뒤 상임고문으로 물러났다. 17대 대선 때는 대통합민주신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2008년 7월 추미애 정대철 후보를 꺾고 민주당 대표에 뽑혔다. 18대 국회 때는 외교통상통일위원회, 국방위원회 위원을 거쳤다. 2010년 10월 민주당 최고위원에 올랐다. 2011년 4월 싱크탱크 국민시대를 출범했다.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됐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지역구를 바꿔 종로구에서 출마했다. 친박 핵심인 홍사덕 전 의원을 접전 끝에 5천 표 차이로 꺾고 5선에 성공했다. 총선이 끝난 뒤 민주당 민생공약특위에서 경제민주화본부장을 맡았다. 2012년 6월 대선출마를 선언하고 당내 경선에 뛰어들었으나 문재인 후보에게 밀려 고배를 마셨다. 문재인 캠프에서 선대위 상임고문을 맡았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꺾고 6선에 성공했다. 대선후보급 격돌로 관심을 모은 지역에서 초반 열세 관측을 뒤엎고 과반 이상 득표로 오 전 시장을 크게 따돌렸다. 2016년 6월부터 2018년 5월까지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냈다. 2019년 12월 문재인 정부의 2대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 ◆ 사건사고 2006년 산업자원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병역논란이 일었다. 병적증명서에 따르면 1975년 7월4일부터 1978년 1월17일까지 병역을 필한 것으로 돼 있는데 쌍용이 제출한 경력증명서에 1978년 1월1일 입사한 것으로 기재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세균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인사청문회에서 편법증여 의혹이 나왔다. 장남이 약 1억 원, 장녀가 약 7천만 원을 보유하고 있는데 소득세나 증여세를 납부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세균은 “90년대 외할머니가 증여한 것과 용돈, 아르바이트 수입, 장학금, 산업체 병역특례 근무 수입 등을 모은 것”이라며 “사회통념상 액수가 많을 수 있으나 법적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이 밖에 잦은 교통법규 위반에 따른 준법정신 결여 지적에 사과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밝혔고 가족 위장전입 의혹에 대해서는 위장전입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장관 인사청문회는 인사검증보다 오히려 정세균이 대표로 있을 때 사학법을 날치기 통과한 데 대한 한나라당의 사과 요구에 집중됐다. 한나라당이 청문회를 거부하는 등 파행이 지속됐으나 정세균은 “한나라당이 불참한 가운데 사학법이 통과돼 안타깝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며 유감 표명을 거부했다. 2012년 총선 때 박사학위 논문 표절의혹이 제기됐다. 새누리당은 정세균이 2004년 2월 경희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이 1991년 6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제출된 이모씨의 석사학위 논문 상당 부분을 고스란히 베꼈다고 주장했다. 이에 민주통합당은 논평을 통해 “표절이라고 주장한 부분은 출처를 모두 밝혔다”며 대꾸할 가치가 없는 억지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학술단체협의회는 5월 기자회견을 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세균의 논문이 인용과 도용을 혼동해 표절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2016년 9월 정기국회 첫날 개회사에서 쓴소리를 하겠다며 우병우 민정수석 사퇴와 고위공직자 비리 전담 특별 수사기관 신설, 사드배치 반대 의사 등을 언급했다. 이에 여당은 환영했으나 새누리당은 “야당 대변인이냐”고 크게 반발하며 해임 결의안까지 제출했다. 결국 새누리당이 국회 일정을 보이콧하며 20대 국회를 시작부터 파행으로 몰고갔다. 새누리당이 보이콧한 가운데 야당단독으로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처리하면서 “세월호나 어버이연합 둘 중에 하나 내놓으라는데 안 내놔, 그래서 맨입으로, 그래서 그냥은 안되는거지”라고 발언한 녹취록이 공개됐다. 새누리당은 정치중립 상실과 직권남용을 저질렀다며 국회의장을 검찰에 형사고발하고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 청구서를 제출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국회의장 사퇴를 요구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이에 정세균은 SNS에 짜장면을 먹는 사진을 올렸다가 새누리당의 반발에 삭제하기도 했다. 2016년 10월 새누리당이 정세균 부부의 ‘황제방미’와 ‘황후쇼핑’ 논란을 제기했다. 국회 예산으로 국회의장 부부동반 출장을 다녀오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딸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1등석을 이용하고 교민들에게 시계를 선물한 것 등도 문제삼았다. 그러나 정세균 측은 미국 하원의장의 공식초청에 따른 것이고 이전 국회의장들도 시계 등을 선물로 줬다고 해명했다. 또 정세균 부인이 연간 수천만 원을 사용해야 받을 수 있는 백화점 VIP카드를 관용차에 부착한 것도 문제가 됐다. 이에 대해 정세균은 “정치적 도를 넘어섰다”며 불쾌감을 나타냈다. ◆ 상훈 ◆ 어록 “대통령이 현 시국의 엄중함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으로 국회와 협력해 주시기를 요청한다, 대한민국의 파국을 바라는 국민은 단 한사람도 없다. 이런 시련과 고통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돌아보고 치유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국회가 단단히 중심을 잡아야 한다. 아무리 혼돈스러운 와중이라 하더라도 내년도 예산안 및 관련 세법 처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달라.” (2016/11/03, 국회 본회의 모두발언에서) “오늘 3당 원내대표 회동은 초유의 국가 리더십 위기를 맞아 국민들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국회 본연의 임무인 예산과 민생현안을 논의하려는 자리였다. 회동을 시작도 하기 전에 여당이 자신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퇴장해 회담을 무산시킨 것은 매우 유감이다.” (2016/10/31, 여야3당 원내대표 회동이 무산되자)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국회법과 원칙에 따라 절차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예산부수법안 지정을 통해 합의되지 않고 일방 통행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라 생각한다. 지난 두 해 동안 세법 처리가 여야 간 충분한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합의보다는 의장의 직권상정으로 처리된 경우가 많았다. 저는 이것은 아주 좋지 않은 전례라고 생각한다. 의장으로서 이번 정기국회의 모든 세법 개정안은 여야가 합의를 통해 본회의에서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겠다. 합의가 이뤄지도록 의장으로서 최선의 지원과 노력을 다할 예정이다.” (2016/10/17, 2016 세법 개정안 토론회 축사에서) “법인세는 우리 세수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세법 개정안이 예산안 처리 이전에 합의가 된다면 부수법안을 지정할 필요가 없다. 여야 간 제대로 조율되지 않아 예산 부수법안으로 지정될 상황이 오면 세입과 관련된 법안은 당연히 지정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6/09/22,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국회의원은 국민의 편에 서서,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께서 우리 국회를 신뢰합니다. 국회의장을 영어로 ‘Speaker’라고 합니다. 상석에 앉아 위엄을 지키는 Chairman이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Speaker인 것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쓴 소리 좀 하겠습니다. 제 개인의 목소리가 아닌 국민의 목소리라 생각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2016/09/01, 20대 국회 첫 정기국회 개회사에서 우병우 거취 등을 언급하며)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3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철 지난 옷’처럼 사회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국가의 최고 규범인 헌법은 시대적 상황에 맞게 다듬고 보완해나가야 최고 규범으로서의 권위와 실질적 효용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제 여야 지도부가 국가개조를 위한 구체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새 헌법질서를 통해 낡은 국가시스템을 혁신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도 충분히 조성돼 있다. 늦어도 70주년 제헌절 전에는 새로운 헌법이 공포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16/07/17, 제68주년 제헌절 기념식 경축사에서) “‘더불어 성장론’은 한마디로 분배냐 성장이냐의 이분법을 넘어 불평등 해소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루는 성장 모델이며, 내수와 수출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성장전략이다. ‘더불어 성장’은 공정경제, 선도경제, 네트워크경제라는 세 축을 통해 더불어 발전을 추구한다." "공정경제를 통해 '분배를 통한 성장'을 추구하고, 선도경제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기업간 협력을 모색하며 네트워크경제를 통해 지역, 계층 간 상생을 추구해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고 한다.” (2016/02/01, 더불어민주당 유능한경제정당위원회에서 경제정책기조인 ’더불어 성장론‘을 발표하며) “혁신위는 종로가 어떤 지역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소선거제 이후 24년간 총선에서 (야당이) 단 한 번도 승리해보지 못 한 지역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보궐선거에서 이겼던 것이 유일한 승리였고 총선에선 내가 이긴 것이 처음이다. 종로 재선이 되고 나서 대권에 거듭 도전해 볼 생각이 있다.” (2015/11/16, 팟캐스트 ‘나는 정청래다’에 출연해서) “청년실업이 국가재난 상태에 이르렀다. 내 아들도 아직 취업준비생이다.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청년정책을 만들고 있다.” (2015/11/27, 성균관대 청년희망정책 특강에서) “우리 정치의 큰 별이 또 한 분 졌다. 우리 민주화의 큰 역할을 하셨고 대통령으로서 정치 개혁의 선구자이셨다. 통합 선거법 만드셨고, 재임 중 금융실명제 같은 경제개혁과 하나회 척결 같은 묵은 유산의 척결에 큰 역할을 하신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에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한다.” (2015/11/22, 김영삼 전 대통령을 조문하며) “수출 대기업 중심의 낙수경제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활력이 솟아오르는 분수경제로 기조를 전환해야 한다. 부자감세가 아닌 서민경제를 살리는 민생경제로, 청년층의 희망과 활력을 살리는 청년경제로 바꿔야 한다. 정부 직접고용이 가능한 공공분야의 신규 일자리를 확충하고, 청년고용할당제를 민간 분야까지 넓혀야 한다.” (2015/10/16, 6대 국정과제를 제안하며) “당 대표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갈등과 분열을 극복해야지 상대를 제압하려고 해선 안 된다. 고충이나 고심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재신임 투표가 지금의 혼란보다 더 큰 혼란을 낳을 수 있어 시기적으로도 방법상으로도 적절치 않다. 전당대회에서 한 번 선출된 당 대표를 툭하면 흠집 내고 흔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게 저의 일관된 생각이지만 문 대표가 총선이나 대선 전망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문제다.” (2015/09/11,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재신임안을 비판하며) “저는 국민의 요구와 당원동지 여러분의 열망에 부응하고자 2·8 전당대회에 출마하지 않겠다. 우리 당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혁명적 수준의 혁신과 통합에 도움이 된다면 이 당의 문지기라도 마다하지 않겠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혁명과 승리를 위해 작은 밀알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번 전당대회가 통합과 희망, 미래를 함께 녹이는 혁명적 용광로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하겠다.” (2014/12/26,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 불출마를 선언하며)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취임하면서 취임 일성으로 들고 나온 것이 분수경제(bottom up economics)다. 분수경제론을 정치권에서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 바로 필자인데 벌써 3년여가 지난 일이다. 그런데 소위 '최경환노믹스'라고 포장한 세법개정안이나 부동산 정책을 보면, 겉모습은 분수경제로 포장했으나 낙수효과에 의존하는 정책임을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다. '최경환노믹스'가 진정한 분수경제를 지향한다면 세법개정안, 부동산 정책 등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낙수경제가 명백한 데 분수경제로 읽어달라는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기 전에, 국회에서 논쟁하여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2014/08/10, 칼럼을 통해 최경환노믹스를 비판하며) “진상규명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한다. 그것이 국정조사든, 특검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받아들여야 한다. 새누리당이 지방선거 때문에 주저한다면 선거 이후에 해도 좋다. 온 국민을 슬픔에 빠뜨리고 사회 전체를 뒤흔든 사건 앞에서 대한민국 정치가 이정도의 노력조차 마다해서는 안 된다.” (2014/05/09,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 SNS에 올린 글) “18대 대통령 선거는 국정원과 군이 개입된 명백한 부정선거다. 국정감사가 끝나는 즉시 행동하는 양심, 깨어있는 시민, 자신을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국민을 대규모로 조직하고 부정선거 규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고강도 2차 투쟁에 돌입해야 한다. 지금까지 증거들이 부정선거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행복을 위해서 대통령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새마을운동과 유신의 부활이 목적이다” (2013/10/21, 18대 대선이 부정선거라며 SNS에 올린 글)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보면 상당한 수준으로 국격이 올라갔다. 한류로 인한 브랜드 가치도 많이 올랐다. 대통령은 외국에 나가서 정상들도 만나고 해야 되는데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국격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 (2012/12/09, 18대 대선을 앞두고 기자들에게) “지금 대한민국에는 유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나는 위기 극복에 요구되는 경험과 전문성을 갖추었고, 균형감각을 지닌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또한 정치 지도자에게 필요한 결단력과 올바른 판단력이 있고, 국민 여러분과 같은 눈높이 생각을 가졌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바뀌어야 한다. 일 해보지 않은 사람, 검증되지 않은 능력은 불안하다. 김대중, 노무현 두 분의 대통령 시대도 넘어서야 한다. 창조적 계승은 답습하는 게 아니다, 극복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 (2012/06/26, 경제대통령이 되겠다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민주당이 한번도 종로에서 승리한 적이 없었다. 저를 뽑아주신 여러분이 새로운 역사를 썼다. 종로의 민심은 대한민국 국민의 민심이다. 민생을 살리고 이명박정권을 제대로 심판하라는 것이 종로구민의 민심이었다. 이런 민심이 표로 제대로 연결돼 제가 종로구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이 곳 종로는 자영업자와 소기업들이 많은 곳으로 민생경제가 파탄났기 때문에 무엇보다 민생경제를 살리겠다. 민주주의를 제자리로 돌려두는 데 노력하겠다.” (2012/04/11, 19대 총선 당선소감에서) ◆ 평가 열린우리당 당의장 두번, 통합민주당 대표 한번 등 세번이나 당대표를 지내며 리더십을 발휘했다. 2005년 열린우리당 임시당의장에 올라 재보선 패배로 어수선한 당내 갈등을 수습했고 2007년 다시 의장에 올라 야권통합에 기여했으며 대선 경선을 관리했다. 부드러운 성격으로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신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온화한 성품으로 당직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스터 스마일이라는 별명도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정치인으로써 색깔이 약하고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잠재적 대선주자로서 지지율도 대개 1~2% 정도로 높지 않은 수준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09년 민주당 대표 시절에는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강행처리하자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고 6일간 단식 투쟁을 벌이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기도 했다. 정세균은 미디어법이 영구집권을 위해 한나라당이 꾸민 전술이라며 헌법 권한쟁의심판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장외투쟁 5개월 만에 원내로 복귀했다. 참여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길지 않게 재직했다. 경제부총리로 입각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으나 산자부 장관에 임명됐다. 한나라당에서 여당의 대표가 장관으로 가는 것을 두고 부끄럽지 않냐고 지적하기도 했으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느 곳이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라고 응수했다. 산자부 장관 재임 기간에 수출 3천억 달러 시대가 열려 3천억 달러의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부인 최혜경씨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최홍준씨의 딸이다. 최홍준씨가 정세균을 대성할 인물로 보고 사윗감으로 점찍었다고 한다. 최씨는 경북 포항 출신으로 가족이 함께 상경해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 재학 중 미팅에서 정세균을 만났다. 정세균이 다녀온다는 말도 없이 군대에 갔지만 끝까지 기다려 결혼했다고 한다. 최씨는 남편이 집에서 말도 잘 안하고 애정표현도 거의 없어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계파색이 강하지 않고 범친노로 분류되기도 한다. 당대표를 세차례 지냈고 대선 후보 경선까지 뛰면서 정세균계를 형성하기도 했으나 20대 총선 공천에서 강기정, 오영식, 전병헌 등 정세균계 의원들이 모두 낙마했다. 법인세 인상에 찬성하는 입장을 갖고 있으며 이전부터 분수경제 등을 주장하며 법인세 인하는 국가 채무만 늘렸다는 주장을 고수해왔다. 일단은 법인세 관련 여야 합의를 종용하고 있으나 합의가 불발될 경우 국회의장의 세입예산 부수법안 지정 권한을 활용해 법인세 인상안을 통과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20대 국회 초반 여야의 극한 대치의 원인을 정세균의 법인세 인상 의지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어린 시절 형편은 넉넉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정고시로 중학교 학력을 취득했고 고등학교는 무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전주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로, 다시 인문계인 전주신흥고등학교로 두차례나 전학을 했다. 공업고등학교에서 항상 1등이었지만 신흥고등학교를 다닐 형편이 안 돼 교장에게 장학금을 달라고 요구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학창시절에는 법관을 꿈꾸다가 유신체제에서 꿈을 접었고 학교 신문사 활동을 하며 언론인이 되고자 했으나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보고 이 역시 포기했다고 한다. 6선을 하는 동안 각종 이권비리에 연루되거나 사생활로 물의를 빚은 적이 없다. 1997년 한보그룹 비자금 사태 특별청문회에서 한보그룹 전문경영인이 유력 정치인에게 불법자금을 다 건넸지만 받지 않은 유일한 인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름에서 비롯된 별명 ‘세균맨’을 갖고 있으며 본인도 이를 알고 즐겨 활용한다. 블로그 이름을 ‘좋은세균 정세균’이라고 하기도 하고 20대 선거 때는 선거유세차량의 이름을 소독차라고 붙이기도 했다. 국회의장이 된 후에 SNS 이용자로부터 세균맨 인형을 선물 받아 국회의장실 책상 위에 두고 있다. 과거 인사청문회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백범 김구 선생과 다산 정약용을 꼽았다. ◆ 기타 1975년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해 1978년 35사단에서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21세기 한국의 비전과 전략’(1999) ‘정세균이 바라보는 21세기 한국의 리더십’(2002) ‘나의 접시에는 먼지가 끼지 않는다’(2007) ‘질 좋은 성장과 희망한국’(2008) ‘정치 에너지’(2009) ‘정치 에너지 2.0’(2011) ‘99%를 위한 분수경제’(2011) 등의 저서를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