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그룹이 30년 넘게 이어진 전문경영인체제를 뒤로하고 오너경영인체제로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이 과정에는 대우조선해양 인수라는 거대한 사업적 변화도 함께 이뤄지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을 둘러싼 조선업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현대중공업그룹이 지속가능하려면 단순한 ‘배 만드는 조선사’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시대가 임박한 상황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는 어디를 향할까?

◆ 현대중공업그룹 정기선체제 거의 다 왔다

현대중공업은 오래 전부터 큰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고 있다. 2013년 발생한 해양플랜트의 대규모 손실부터 시작해 2016년 유례없는 수주가뭄 등을 겪으며 고난의 행군을 이어오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는 결국 주력인 조선부문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미래 먹거리인 비조선부문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에 달려 있다.

조선부문을 보면 그나마 2019년 이후 분기별 영업이익 흑자기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코로나19로 선박 발주가 여의치 않다 보니 여전히 보릿고개가 이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룹 차원에서 힘을 싣고 있는 비조선부문의 성과도 아직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자세히 살펴봐야 할 변화가 하나 있다. 바로 현대중공업그룹의 리더십 변화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인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은 앞으로 수년 안에 현대중공업그룹을 공식적으로 진두지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비록 올해 그룹 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하진 못했지만 그룹 후계자로서 경영전면에 나설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 재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정 부사장의 그룹 내 위상은 그룹 내에서 공식 직함을 3개나 맡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지주회사 현대중공업지주의 경영지원실장이며 그룹 산하 조선3사의 영업을 총괄하는 선박·해양영업본부 대표이기도 하고 계열사인 현대글로벌서비스의 대표이사도 맡고 있다.

최근 현대중공업그룹 이사회가 미래 신사업을 발굴하기 위해 만든 미래위원회의 위원장에 오르기도 했다.

정 부사장의 여러 직함은 조만간 현대중공업그룹의 오너3세시대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 재계의 사례에 비춰볼 때 오너의 자제가 경영권을 승계하는 것은 얘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중공업그룹의 역사를 보면 현대중공업그룹에 오너경영인체제가 열린다는 의미는 남다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1987년까지만 해도 정몽준 회장의 오너체제로 운영됐다. 하지만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1988년 정계에 진출한 뒤 기업 경영을 30년 넘게 이끌어온 사람들은 모두 전문경영인들이었다.

30여 년의 전문경영인 체제를 뒤로하고 오너경영인 체제로 복귀한다는 것은 여태껏 좀처럼 보지 못했던 많은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도 할 수 있다.

◆ 오너 정기선, 전문경영인체제의 한계 넘어서는 성과 낼까

현대중공업그룹의 오너경영인체제는 중요한 변곡점에서 상대적으로 취약점을 드러냈던 전문경영인체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전문경영인체제에서 비약적 성장을 한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현대중공업의 연결기준 매출은 1990년대 후반에 연간 6조 원 수준이었으나 2011년에는 53조 원을 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호황기를 잘 탄 덕분이라는 평가가 많다. 선박발주 호황으로 주문이 밀려들다 보니 세계 1위 타이틀을 지니고 있던 국내 대형조선사에 일감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문경영인체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수주가뭄을 맞닥뜨리자 약점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단기성과에 집착하는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한국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은 공동으로 조사해 발표한 ‘조선업 전망 및 향후 발전전략’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이런 단기성과의 폐단을 지적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조선사의 CEO와 각 분야의 경영을 담당하는 임원들은 임기가 약 2~3년으로 단기이고 매년 평가에 따라 보상뿐 아니라 직위의 유지 여부까지 좌우된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영업담당 임원이나 CEO는 3년 후의 적자를 생각하기보다는 단기적 성과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적자는 3년 후에 판가름 나지만 CEO를 비롯한 임원의 재계약 여부는 그보다 이른 시점이므로 눈앞의 프로젝트 입찰에 낮은 가격과 불리한 조건을 모두 수용해서라도 이를 수주하는 것이 단기적 성과를 올릴 방안이라는 것이다.

또 3년 후에 발생할 영업적자에 대해서는 생산, 구매, 노무 등 여러 분야에 책임을 공동으로 지움으로써 CEO를 비롯한 임원의 책임을 분산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우선 수주하는 것이 더욱 유리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단기성과주의의 폐해라고 지적한다.

2011년 이후 진행됐던 한국 대형조선업계의 해양플랜트사업은 이러한 실패의 극단적이며 전형적 사례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기선 부사장시대는 현대중공업그룹이 전문경영인체제에서 겪었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새로운 시대가 될까?

정 부사장은 2021년이면 우리 나이로 40세가 된다. 앞으로 그룹을 이끌어나갈 기간이 상당한 만큼 그동안 전문경영인들이 섣불리 하지 못했던 장기적 전략을 세우고 큰 그림을 그려나갈 기회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현대중공업그룹 관계자는 리더십 변화를 놓고 “현재 회사는 소유와 경영이 완전히 구분되어 있는 상태라 오너경영인체제 변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어렵다”며 “현재는 그룹 경영이 권오갑 회장과 한영석·가삼현 사장의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 이외에 리더십 변화에 더 드릴 말씀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 미리보는 정기선체제, 현대중공업그룹은 지금 무엇에 집중하나

정기선 부사장이 이끌어갈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를 보려면 신사업을 봐야 한다.

정 부사장은 현대중공업그룹이 미래 3대 먹거리로 낙점한 바이오와 인공지능, 수소에너지 등 신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최근 출범한 그룹 산하 미래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미래위원회는 그룹 차원의 신사업을 빠르게 전개하기 위한 핵심 조직으로 평가받는다. 정 부사장이 이 조직의 수장을 맡은 것은 그룹 차원에서 4차산업혁명의 돌파구를 서둘러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드러낸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현재 각 계열사별로 신사업 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는 사업을 빠르게 찾아 안착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바이오사업은 서울아산병원과 의료데이터를 활용하는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인공지능사업은 현대로보틱스라는 계열사를 통해 로봇사업에서 기회를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수소에너지사업은 수소경제의 한 축이 될 수소운송 시장을 겨냥해 연구개발에 몰두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한국조선해양은 수소증발가스 처리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조선사가 바이오와 인공지능, 그리고 수소에너지를 얘기하는 이유는 조선업의 역사와 국제적 흐름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업은 그동안 미국에서 유럽, 일본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주도권이 흘러온 대표적 산업이다. 이 흐름을 살펴보면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이나 중진국들에게 산업의 주도권이 계속 이양된 산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 LNG추진선과 대형 컨테이너선 등 일부 고부가가치 선박을 제외하면 한국이 중국에 밀리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업만으로 기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릴 것에 대응해 기존에는 조선사로서 말하지 않았떤 신사업을 서둘러 꺼내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최근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전에 참여한 사실도 이런 고민들과 맞닿아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해 현대건설기계와 건설기계사업에서 시너지를 노리고 있다. 안정적 현금창출원(캐시카우)을 그룹 안에 만들어냄으로써 조선업황의 불황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사업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정 부사장은 현대중공업지주의 경영지원실장으로서도 신사업 발굴에 적극적 모습을 보여왔다.

그룹의 로봇사업부문 계열사인 현대로보틱스는 2020년 6월 KT에서 500억 원 규모의 상장전 지분투자를 유치하는 계약을 맺었다.

정 부사장은 이 자리에 직접 참석해 “앞으로 제조업체의 경쟁력은 단순히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흐름을 읽고 변화하는 데에서 결정될 것”이라며 “KT와 폭넓은 사업협력이 현대로보틱스는 물론 현대중공업그룹이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경영전면에 나선 첫 사례인 현대글로벌서비스의 대표이사로서 친환경선박사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일구어나가는데도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 흔들리는 조선부문의 경쟁력 어떻게 강화하나

정 부사장이 지닌 여러 직함 가운데 당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룹 선박·해양영업본부 대표라는 직함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부문, 즉 ‘배를 만드는 회사’라는 줄기가 흔들리면 그 옆에 신사업이라는 가지가 제대로 자라나기 힘들다.

정 부사장이 그룹의 중추인 조선부문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가느냐가 경영권 승계를 위한 마지막 퍼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 나오는 이유다.

우선 정 부사장은 현대중공업그룹에 사업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나라와 관계를 다지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진행하는 아람코 조선소 프로젝트는 정 부사장이 주도한 첫 해외사업이다.

현대중공업과 아람코가 2015년 11월 전략적 협력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양해각서에 서명할 당시 권오갑 당시 현대중공업 부회장이 “아람코 프로젝트는 정기선 총괄부문장이 더 잘 안다”고 말했을 정도다.

정 부사장은 올해 2월에도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 현대중공업과 아람코의 장기 공급계약 양해각서 체결 성과를 이끌어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이외의 산업을 국가적으로 육성하려는 데 주목해 현대중공업이 조선업 분야에서 사업기회를 찾으려 애를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정 부사장은 사업기회 모색 이외에도 조선부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잘 하는 데 더 집중한다’는 전략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 정부가 조선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목적보다는 업황 침체에 따른 부실화와 대규모 실업사태, 그리고 지역경제의 붕괴 등을 막기 위한 방어적 차원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조선업을 세계 선도산업으로 만들기 위해 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 조선사들은 벌크선 등 일부 시장에서는 사실상 중국에 주도권을 내줬다.

가격 경쟁력도 뒤처지고 있다. 산업연구원의 2016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신조 가격경쟁력을 100으로 봤을 때 중국은 115 수준이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그룹을 비롯한 한국 조선사들은 친환경선박이나 LNG선박과 같은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에서는 독보적 경쟁력을 다지고 있다.

산업은행 산업기술리서치센터 분석에 따르면 한국 조선사들은 벌크선과 탱커를 제외하면 컨테이너선과 LNG선, LPG선에서는 아직 다른 국가를 앞서는 경쟁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가격만 제외하면 선주들이 요구하는 품질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납기일을 맞추는 능력 등에서 경쟁국가보다 훨씬 앞서있다는 뜻이다.

이런 분석들을 종합해볼 때 결국 현대중공업그룹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도 고부가가치 선박에 집중해 주도권을 꽉 틀어쥐는 전략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정 부사장은 2018년 9월 해외에서 열린 해양박람회에 참석해 “현대중공업의 초대형 가스운반선(VLGC)은 가스추진선으로 친환경성을 신뢰할 수 있는 선박이자 연비 효율성을 통해 이익도 극대화할 수 있는 선박”이라며 고부가선박 영업에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룹의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이미 독자기술로 전기추진 선박 건조를 시작했고 운항되는 대형선박에 자율운항을 보조할 수 있는 기술도 탑재하고 있다.

이밖에도 지능형 통합제어시스템이나 스마트 원격관제기술, 스마트 유지보수기능, 선박운전 최적화시스템 등의 기술도 선박에 차례대로 적용하겠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물론 위험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 고부가선박으로 꼽히는 LNG선을 보면 성장성이 높기는 하지만 현재 선복량이 일반 탱커의 8%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대형컨테이너선을 봐도 해운시장 흐름에 따라 수요 자체가 크게 늘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정 부사장이 현대중공업그룹 조선부문의 경쟁력 고도화를 고부가가치 선박 집중전략으로 뚫어낼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문제다.

◆ 토요타 월마트, 오너경영인체제 변화 통해 위기 극복했다

경영체제 변화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든 회사는 여럿 있다.

일본 토요타만 하더라도 금융위기 당시 14년 동안 이어오던 전문경영인체제를 끝내고 창업주의 손자인 토요다 아키오 회장이 전면에 나서 위기를 극복했다.

오너 입장에서는 회사의 운명이 곧 본인과 가족의 운명과 결부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력투구를 다해 회사를 살릴 수밖에 없는 과제가 주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 월마트와 K마트의 사례도 오너십이 기업의 명운을 가른 대표적 사례다.

월마트는 창업주 사망 이후 장남이 이사회 회장을 승계하면서 최고의 유통강자가 됐지만 같은 시기에 태동했던 K마트는 전문경영인체제로 전환했다가 장기전략을 세우는데 약점을 드러낸 탓에 결국 쇠락했다.

물론 오너경영인체제가 장점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너의 독단적 경영을 견제하지 못한다면 경영권의 오남용과 사익 추구 행위 등의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유능한 전문경영인 영입으로 기사회생한 기업들도 얼마든지 많다. 일본을 도주해 더욱 유명해진 카를로스 곤 전 닛산 CEO도 회사를 수렁에서 구해낸 전문경영인이며 파나소닉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도 ‘성역없는 개혁’을 외쳤던 전문경영인 나카무라 구니오 사장이었다.

포스코경영연구원도 리더십의 장단점을 놓고 “오너경영과 전문경영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측면만을 보고 특정 소유구조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기에는 난해하다”고 바라보기도 했다.

오너십의 장점을 잘 살릴 수만 있다면 오너경영인체제로 이룰 수 있는 강점은 명확하다.

구심점을 명확히 해 전대미문의 위기상황을 돌파하는데 여태껏 많은 오너십들이 그 성과를 증명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대중공업그룹이 정기선 부사장 중심의 오너경영인체제로 긴 불황의 터널을 잘 넘어갈 수 있을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채널Who 남희헌 기자]